아직 길을 잃은 청춘이지만 방황마저도 나를 찾는 여정이길 바라며. 모든 이야기를 너무 무겁지만은 않게, 때로는 힘을 담아서 써보려고 합니다. 한 분이라도 이번 매거진에 관심을 가져 주신다면 감사드릴 것 같아요. 첫 번째 이야기는 저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됩니다.
가난하면 선택지가 없다
재미있게 본 <그 해 우리는>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김다미 배우가 맡았던 '국연수'라는 캐릭터의 대사 중 하나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와 둘이 살며 삼촌의 빚까지 갚아야 했던 연수는 대학 졸업 후 채용 공고에 지원하면서 이런 말을 했는데요. '내 인생은 선택지 없는 시험지 같다'는 말이었습니다. 저희 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즘 것들의 사생활>이라는 채널에서 '달변가 영쌤'이 말씀하셨듯이 가난이라는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얼마나 가난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제게 가난은 사람을 작아 보이게 만들고, 남들에겐 당연한 것이 내겐 당연치 않으며, 빛나는 인생도 무채색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가난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그냥 살았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집의 빚이 수억으로 늘어나며 저희 가족은 작은 월셋집으로 이사했습니다. 어머니는 매달 월세를 내지 못할까 걱정하셨고,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는 해외 개발도상국을 전전하셨습니다. 부모님은 비정규직과 계약직으로서의 생활을 이어나갔고 저희 집은 매달 생존의 전투였던 기억이 납니다.
찢어진 소파를 바꿀 수 없었고, 연식이 제 나이를 훌쩍 넘은 고물 TV에서 화면이 나오지 않아서 TV를 손바닥으로 치면서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식탁은 2-30년 동안 같은 식탁을 사용했으며 당장 생활비가 없어 다음 달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외식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스타벅스에서 몇 천 원 아메리카노나 주스를 사먹는 것도 사치라 여겨져서 스타벅스를 가본 적이 없습니다. 형제자매뿐 아니라 부모님도 지갑에 몇천 원 지폐도 없는 시절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스타벅스나 프랜차이즈 카페는 한 잔에 만 원이 넘어서 부자들만 가는 곳인가보다,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중학생 때 감사하게도 일본에 3일 정도 갈 여유가 있었지만 그 외의 해외 여행은 인턴을 해서 돈을 모아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여행갈 수 있을 때까지 가보지 못했고, 10대 때 문방구에서 필기구나 샤프도 4,000원이 넘으면 비싼 것이었기 때문에 정말 낡아서 못쓸 때가 되어서야 2~3,000원짜리 하나씩 샀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단순히 가난했다는 사실을 푸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가난은 죄도 아니고, 누군가 혼자만의 잘못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가난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그리고 가난을 한 번이라도 겪어 보았다면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남기고 싶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단순히 돈이 없다, 가 아니라 생각보다 일상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주고, 세월이 지나서도 그 사람에게 지울 수 없는 상흔과 그림자를 남긴다는 것을요.
이렇게 유년기부터 20대 초반까지 대략 20년의 세월 동안 가난을 겪는 동안 제 인생에서 자연스레 선택지는 사라져 갔습니다. 10대 때는 지금은 많이 쓰이지 않는 격언이지만 '개천에서 용 난다'는 메시지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만이 살길이라고 믿고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그래서 제 10대 시절은 학교와 집, 두 가지 기억뿐입니다.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거나 노래방을 가는 것도 극히 드문 일이었기에 10대 시절은 그렇게 회색의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뒤를 돌아보았을 때 적어도 그 어려운 환경에서 '치열했었다'는 것 한 가지만큼은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제 삶의 다른 부분은 무채색이었을지 몰라도 공부했던 열정만큼은 색이 남아 있으니까요. 사교육을 감당할 형편이 되지 않았기에 학원 없이 자기주도학습을 실천했지만, 그럼에도 제 10대가 마냥 저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주변의 많은 압박을 견뎌야 했던 모범생의 10대였고, 그러한 시절을 거치면서 지금의 제가 되었습니다. 다음 화에서는 착한 아이 증후군에 갇혔던 모범생 시절의 이야기를 써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