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2 (일) 강원도 정산 민둥산
이르면 9월 말부터 10월 초 중반까지 억새가 장관인 철이라는 소리가 문득 생각이 났다.
산은, 특히 관광버스를 타고 멀리 이동하여 고생고생하며 올라가는 그 등산은 엄마만 따라다녀 보았지, 능동적으로 계획했던 적은 없다.
산과 꽃, 바다 들 이런 자연환경에 노닐고 싶어지는 게 좋아진다면 본격적인 완숙의 나이로 접어들 때쯤이라고 했던가,
카페나 영화관, 미술관, 도심 속 어느 곳엘 다녀도 수많은 건물 속을 떠돌 뿐이다.
그것도 순간 지겨워졌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고, 전보다 땀을 흘리며 산에 다녀와 보고 싶다며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생각도 하게 된다.
모든 새로운 시작엔 친구와 함께 하고 싶어진다.
친구 연주와 티몬 여행상품을 구매하여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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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역 쪽에서 7시 30분 출발지를 신청했기에 해도 뜨지 않은 컴컴한 새벽길을 부랴부랴 헤쳐갔다.
잠자리를 뒤척이다 자다 깬 것 말고는 새벽 5시 좀 넘은 시간에 일어나 보긴 무척 오랜만이었다.
그 시간에 부지런을 떨다 보니 아무 생각 없이 흘려보내는 시간 중 몇 점을 주섬주섬 주워올리는 기분이 들었다.
강원도는 생각보다 멀었다.
짧은 휴게소 시간을 빼고서라도 길이 밀리지 않을 때도 멀다는 느낌이고, 이천 즈음부터 길이 밀리기 시작한 하행의 여정에는 더더욱 멀다는 느낌이었다.
민둥산 근처에 다가서자 빗방울이 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떠나는 날의 여행은 모두 맑음이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이 올 때도 있음을, 그래도 결제한 여행상품은 물릴 수 없음을, 기뻐해야 할지 울적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우선 떠난다.
그러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상황에 적응하는 능력과 감정의 분배는 이런 좋지 않은 상황에서 길러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비가 주룩주룩 내리지는 않았다.
입고 온 외투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 쓰면 견딜 만 했다.
폭우라던가, 소나기가 내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누구든. 어떤 것에든.
증산초등학교에서 올라가기 시작해 민둥산을 보고 다시 증산초등학교로 내려오는 코스를 택했다.
억새밭을 보려면 민둥산까지는 올라가야 했고, 그전에서 끝나는 코스는 의미가 없었다.
더 멀리 돌아보는 4코스를 처음엔 욕심냈었더랬지.
지금 생각해보면 가당치도 않은 패기였다.
사람들이 따라가는 대로 올라갔다 내려오다 보니, 돌아본 코스가 2코스인지, 3코스인지는 잘 모르겠다.
시작 부는 숨이 껄떡껄떡 넘어가는 급경사가 몇 번 반복되다가 완만한 오르막이 계속 이어진다.
사람들 사이로 뒤처지지 않고 따라갔으니 잘 올라갔다고 자부하고 싶다.
길이 좁은 편이라 중간중간 쉴 곳은 여의치 않다.
올라가는 어느 산악회 아저씨 말로는 오래 쉬었다 가면 더 힘이 들기에 천천히 쉬지 않고 꾸준히 올라가는 게 더 낫다고 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친구를 기다리면서 한쪽 길에 비켜서있다 보니 사과도 얻어먹었다.
사진을 찍어달라 하여, 4명의 아주머님들 단체 사진도 찍어주었다.
완벽한 사진사였다.
힘에 슬슬 부칠 때쯤에 억새꽃이 몽실몽실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둘 나타나는 군락지에 마음이 들썩들썩 거렸다.
다 온 것 같은데 하는 순간이 더 오랜 기다림을 느끼게 하듯, 정상 근처로 올라갈 때가 제일 힘들었다.
더 올라갈 곳 없는 하늘 아래 산등성이에 억새가 지천 가득 피어있었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했고, 야속하기로 작정한 햇빛은 비치는 지점이 점 단위라고 느낄 정도로 짧고 작게 순간을 비추다 다시 사라졌지만.
은빛 억새가 스르륵 흔들리는 풍경은 빛의 유무 없이 멋졌다.
굉장히 멋스러운 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꽃에게 부여되는 아름답다, 예쁘다, 청초하다는 수식은 억새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메마르고 척박한 땅에서 거센 바람에 꺾이지 않고 흔들리며 생명을 지켜내고 있었다.
억새길 사이로 오종종종 걸어다니는 알록달록 등산복 군단들이 멀리서 보면 커다란 억새밭이 수술이고, 사람들은 암술 같아 보였다.
사람을 품는 꽃이랄까.
산의 정상에선 산 너머의 다른 산을 보거나, 작아져있는 아랫마을을 신선이 된 기분으로 볼 수 있는데
민둥산은 억새꽃이 사는 또 하나의 세계문으로 열리는 길 같았다.
고생해서 올라온 보람을 충족시켜주는 풍경이다.
내려가는 길은, 험난했다.
몸에 적당한 힘이 들어가는 오르막길과는 다르게 평길 없이 계속 내리지르는 길은 온몸에서 헛기침할 기운도 빠져나가게 하면서, 절대 다리 긴장은 풀 수 없게 만든다.
합이 맞지 않은 근육과 관절 상태가 느껴졌다.
이번에 산을 올랐다 내려오면서, 전보다 더 내리막이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사람 사는 세상도 그렇다.
기를 쓰고 올라갈 때의 생은 빠르던 늦던, 정상이라는 목적이 있고 그 목적에 다다를 때가 있다.
아직 올라갈 곳이 남았다고 생각할 때가 행복한 것이다.
예전과는 다른 대우, 시선, 가진 지위를 내려 놓기 시작하는 내리막길이 심적으로 더 힘들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더 가질 수 있을지는 알지만,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없을지, 가진 것을 적절히 내놓을 수 있을지는 잘 알지 못한다.
젊음을 불태우던 청춘이라는 이름에서 한두 발짝 멀어지는 연습이 참 힘들더라.
산을 내려오면서 안전하고 품위 있게 내리막을 걷는 건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물파전과 산채 비빔밥을 먹을 때는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