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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물고기 Feb 07. 2020

나의 하쿠나마타타 메시지

퇴사 앞에 작아진 마음 회복하기


또 한번의 퇴사를 앞두고 있다.
남들보다는 짧고 잦게, 회사를 옮겨 다닌 편이라 ' 한 두번 해본 것도 아니잖아 ? ' 라면서 꽤 담담한척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루아침 뒤바뀐 변덕에 마음이 동해서 갑자기 퇴사를 결심했던 것은 아니다.
나의 이력서는 항변의 타당성이 다소 부족하긴 하지만, 사직서를 쓰기 전까지 나름의 이유와, 사정과, 고심으로 낑낑거렸고, 도무지 퇴사 외에는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 고른 선택이었다.

이번 회사에서의 약 7개월간의 근무를 짧게 되짚어 보면 입사 후 2개월까지는 까칠하고 예민한 사수로 힘들었고, 그 사수가 그만둔 뒤 사수의 업무가 내 업무로 포지션이 바뀌게 되었다.

후임을 구하기 위해 채용공고를 내기 전, 대표는 나에게 다른 업무를 배워볼 수 있는 기회이지 않겠냐 이왕이면 제품 이해와 고객 상담을 같이 한 직원이 MD업무를
해봐 줬으면 좋겠다고 하셨고, 나도 해보지 않았던 업무지만 열심히 배워보겠다 라고 응해, 새로 들어오게 된 직원은 원래 내 포지션이었던 CS 직원이 되었다.

그 직원에게 발주, 제품상담, 교환반품 상품의 택배 검수, 처리 방법 등의 업무를 인계해주었지만 회사가 정한 가이드라인에 위배되는 처리를 종종 할 때가 있어,
계속 챙겨 봐야하는 불편함이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원래하던 일도 내 일이 아니게 되었지만 내일에서 벗어나질 못했고, 새로 배워야 하는 일은 누가 알려주는 이가 없어 막막했다.
가령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 대표님 상품페이지 수정하는데 이런 오류가 생겨서요, 정산금액이 신고된 금액과 맞지 않는 것 같은데 어떻게 알아봐야 하나요, 등등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라고 한
대표에게 물어보면
" 해당 쇼핑몰 고객센터나 상품담당자에게 물어봐라, 메뉴얼을 확인해보라며 문제풀이 방법을 물어봤을 때 교과서 참고하라와 다를 바 없는 답변만 했다.

그래서 각 쇼핑몰 사이트에 올려진 최소 30페이지 이상의 가이드를 읽고, 또 다른 쇼핑몰 가이드를 읽으면서 그 전 쇼핑몰은 처리방법은 잊고 다시 익히기를 반복했다.

또, 제품 판매증진을 위해 쇼핑몰 MD에게 자사 상품의 우수성, 강점을 어필하고 할인가격을 제안해서 구매자 눈에 잘 띄는 목 좋은 판매 구좌를 달라고 사정해야 했다.

한 대형 오프라인 팬시점의 전국구 영업담당자에게 상품을 제안하는 메일을 지속적으로 발송하라고 했다.

행사 기획 후 해당 채널로 판매되는 수익의 일정 %는 내 인센티브로 챙겨주겠다고 했지만 그건 그다지 구미가 당기는 제안은 아니었다.

나는 미니멀리스트 지향자고, 과장된 마케팅, 상품 출혈 경쟁에 피곤해했다.

필요한 물건은 신중하게 고민한 구매자가 자신의 삶과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가치 있는 상품으로 전해졌으면 했다.

그래서, 저가의 제품을 중국공장에서 대량으로 들여와 유명 대기업 제품보다는 저렴하다는 이유로 ' 가성비 ' 외엔 내세울 게 없는 상품 자체에도 실망을 했고,
원래 팔던 가격보다 더 더 더 많이 할인가를 제시해야 대형 쇼핑몰 행사 상품으로 끼워주겠다는 그네들의 리그에서 매번 비굴해졌어도 답변조차 받지 않을 때도 많아 지쳐갔다.

그런 와중에 사건이 터졌다.
한 쇼핑몰과 초저가 마진으로 행사를 시작했고, 그 제품이 예상외로 인기가 좋아 재고가 빠르게 줄어갔다.

그날은 오후에 외부 교육이 있었고, 대표 내외는 집안 사정이 있어 회사에 나오지 않은 날이었다.

그 제품을 사용하기 위해 약 80%정도의 필수품인 구성 상품이 있어야 하는데 구성상품 재고 또한 빠르게 소진되고 있었다.

하지만 마침 회사 바깥에 있던 날 재고가 간당간당하게 떨어질 줄은 나도 몰랐고, 대표도 몰랐고, 아무도 몰랐다.

책망 첫번째는 왜 노트북을 가져가지 않았냐였다.
재고 체크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게 노트북을 챙기란 이유가 그래서였단다.
일전에 디지털 노마드를 생각하고 있다는 회사의 포부를 들을 때 ' 노트북도 대여해 줄 수 있다 ' 정도로 들었고 교육일정이 있을 때 꼭 가지고 다니란 소리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 노트북을 들고 교육을 받는 와중에 업무를 했을 수도  있는데 시도조차 하지 않은 내 책임도 크다고 생각하니까 넘어간다.

책망 두번째 CS직원에게 남은 재고를 전달해주라고 했는데 왜 그 쇼핑몰 MD에게 남은 재고 조정을 하지 않았냐이다.

그 전에 MD쪽에서 상품 인기가 너무 좋으니까 당초 계약된 재고보다 더 많이 공급해달라, 몇 개까지 가능하냐, 등등 정신이 없었고 이것도 대표 컨펌이 있어야 하니까 중간에서 왔다 갔다 말을 전하면서 정신줄이 풀려갔다.

재고 몇개가 남았다는 메시지를 받았고 재깍 MD에게 몇개 남았으니까 그 이상은 주문 들어오지 않게 처리해달라고 했어야 했는데 메시지를 본 당시에는 멍  ~ 한 상태로 알겠다고 대답만 했다.

교육 종료 후 부랴부랴 집으로 와서, 다른 쇼핑몰 사이트에서 그 재고가 나가지 않게 품절 처리를 했고 이 조치가 내가 했어야 하는 조치라고 판단 미스를 했다.

집에서 업무를 보던 중, 이미 발송된 상품들 중에 CS직원의 발주 실수로 구성품이 누락된 주문 약 200여건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직원 실수로 손해금액을 계산하니 약 70여만원 정도였다.

다음날 상황 보고를 했고, 이 모든 잘못은 그 쇼핑몰에 재깍 재고 품절처리를 하지 않은 내 책임이 되어 있었다.

그 구성품을 보내주기 위해 중국에서 들여오는 가격보다 비싸게 국내에서 급하게 구하게 되었고, 그런 손해, 저런 손해 등등이 합쳐져 따가운 시선의 종착지는 나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억울하다, 판매 추이를 잘못 예측한 것은 대표 잘못도 있고, 발주 실수 담당자는 따로 있다고 잠깐 생각 했었지만 문제 상황보고를 할 때 CS직원의 발주 실수를 유독 크게 강조 했던 것 같아 미안하고 내 자신이 굉장히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네가 처음부터 잘 확인 했었어야지 식의 논리는 참 막강했다.

모든 문제상황 앞에 이 논리를 우겨 넣으니 내 일이 아니 었어도 내가 한번 더 체크 했었어야 일을 잘 하는 사람이었던 거고 회사가 요구한 업무능력을 갖춘 사람이 되는 거였다.

해보면 잘하게 될 줄 알았다.
하다 보면 능숙까진 못되어도 적어도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어떤 업무를 진행할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자기 업무를 적어 내려가는 파일들이 있는데 영업, 마케팅 다른 부서의 직원들이 기재한 내용을 보다가 내 파일을 보면 이 업무내용이 무슨 부서 업무라고 해야 할까 일관성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선택과 집중을 몰랐다.

내가 어떤 업무에 힘을 쏟아야 하는지 일을 하고 있는 도중에도 다른 일에 실수가 있진 않을 지 다시 돌아가 검토하며 웹사이트 25개의 창을 널뛰기했다.

결국 이번사건에 ' 굉장히 실망했다 ' 사실 회사에서 손해가 크기 때문에 사직, 사유서를 요구 할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는 말을 들었다.




'' 너 해고야 " 라는 직접적인 단어를 듣지 않았을 뿐이지 대표내외의 심중 의사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눈치까지 없어서야 될까 싶어 퇴사 의사를 전달했고 바로 채용공고를 올리겠다, 새 직원 정해지면 인수인계 1주일, 최대 30일까지 퇴사 일정으로 생각하면 된다는 답변을 받았다.

퇴사의사를 밝힌 이후 퇴사일까지 견디는 시간은 마치 가시방석과 같다.

업무 소요시간을 묻길래 이정도 될 것 같다고 하면 왜 그렇게 오래 걸리는지 이해가 안된다 부터 시작해 제대로 협의하고 넘어가지 않았던 업무 구분에서 누락이 발생된 것도
모두 내 잘못이라고 표나게 지적하기 시작했다.

열정적으로 제품을 팔아보고자 마음먹지 않은 것은 회사에게 미안하지만 회사에게 가졌던 미안한 마음은 다른 직원에게 내 험담을 잔뜩 했기 때문에 이기주의 인간의 특성상
내 쪽에서 조금 더 괘씸하다고 생각하고 말기로 한다.

신제품 출시 전 제품 테스트, 출입자 관리, 메일 분류 이게 왜 온라인 판매 관리자가 해야 하는 일이지 ? 싶은 것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고 버티지도 못했고, CS직원을 감싸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고, 애매하게 나쁜 인간이 되었고, 자기 일하나 쳐낼 것은 쳐내고 살려서 키웠어야 할 일도 있었을 텐데 집중하지 못했다.

갈수록 무지몽매함에 스스로 기가 차는 중이다.

파릇파릇했던 20대 보다 이해도가 떨어지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져셔 여남은 생 동안 나의 밥벌이는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고민이 불쑥 산처럼 솟아 눈앞을 가로 막는 것 같다.

나의 쓸모와, 존재, 나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진로 고민은 성장기가 지나도 당최 끝나질 않는다.

살아가는 게 조금 머쓱하고, 어색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내 자신에게 태어난 모든 숨에겐 이유가 있다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나도 존중 받고 싶다며 울부짖고 싶은 마음을 토닥인다.

요즘 나의 하쿠나마타타 메시지는 ' 오르다 보면 언젠가는 산을 넘을 수 있다 '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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