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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물고기 Mar 03. 2020

자전거 깨우기

사진일기 두 번째

자고로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정신을 집중하겠다며 책상 정리에 전력을 다하고 정작 공부할 땐 노곤해져 엎드려버리니 제 누울 곳을 정돈하는 것에 힘을 뺀 꼴을 만든다.


바지런한 백수가 되어보겠다고 결심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집안 청소였다.


가볍게 먼지를 털고, 청소기를 돌린 뒤 바닥을 닦는 건 일주일에 서너 번으로 후딱 해치우기 때문에 결심의 포문을 여는 정도라면 앞, 뒤 베란다 물청소, 화장실 청소, 창문 닦기 정도는 추가해주어야 비범함을 알리는 의식이 될 수 있겠다.


혼신의 청소를 마치고 새벽 다섯 시 반에 엄마와 같이 만든 쑥개떡을 씹어먹었다.


그때 나눴던 대화가 묘하게 기분이 나빴었다며 되새김질한다.


엄마는 내 패션 지적을 매~~~~~일 하는데 근 일주일은 집에만 있었기 때문에 타깃은 홈웨어가 되어 있었다.


엄마가 바라는 홈웨어 패션이 내가 입는 옷들이 아니란 걸 알지만 이상한 논리로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시키려는 비겁함이 느껴졌고

' 아니 이건 엄마라도 좀 너무 한데?' 싶어 울화를 되받아쳤다.


" 집이라도 그렇게 펑퍼짐한 옷만 입지 마라, 몸을 조여주지 않으니까 자꾸 퍼지는 거야 몸에 딱딱 맞게 들러붙는 옷을 입어야 이뻐지는 거지!"


몸을 압박하는 옷들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사실은 더 찾아볼 것도 없이 자명한데 어째서 엄마 입에선 몸을 퍼지게 하고 예쁘지 않게 망쳐버리는 논리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또, 아직도 누군가에게 예뻐 보이기 위한 몸을 만드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 언짢아졌고 어렸을 적 친척들 앞에서 우리 딸은 살이 쪘으니 먹을 것을 주지 말라며 손등을 찰싹 내려쳤던 매서움이 떠오를 찰나

" 아니 그냥 엄마 눈엔 내가 집에 있다는 게 싫은 거잖아 그렇다고 솔직히 얘기하면 되지 왜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는 거야?"라고 발설했다.


엄마는 " 옷보다 집에서 너무 누워 있는 게 보기 싫다"라고 정정했다.


나도 내 무기력함이 진절머리 나는데 소파에 픽, 침대에 픽, 누워 있는 모습은 엄마의 짜증을 돋우기에 충분할 수 있다. 이건 맞다.


그렇다고 엄마가 보는 앞에서만 또랑또랑 눈을 뜨고 있다가 시선이 사라지면 헤이 헤져 버리는 행태는 유아기로 도태된 것 같아서 앞에서도 뒤에서도 한결같고자 했건만 이 편도 치졸하긴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는 확실히 그만 누워야 했다.


청소 뒤엔 29개월 매달 58,900원의 약정이 걸린 영어학습기를 3주 만에 다시 집어 들었다.


기초 실력 정도의 영어가 앞으로도 고만고만한 레벨에서 무한 반복하며 물장구치고 있을 듯하다.


쉬운 레벨에서 A를 받고 출석도장을 콩 찍고 나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학습기를 하는 맛이겠다.


월요일은 구독하는 웹진이 많이 수신되는 날이라 읽을거리가 많다.

뉴닉(뉴스) , 어피티(경제), 개인 발행 웹진 2개, 그리고 브런치 글 몇 편을 읽고 나니 오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자전거를 다시 타고 싶었다.


가능하면 제1의 교통수단으로 활용해보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핸드폰 지도를 보며 다닐 수 있도록 폰 거치대도 미리 주문해두었었다.


거치대를 핸들바에 달고, 먼지도 닦을 겸 계단 복도에 세워둔 자전거를 몇 달 만에 현관으로 들였을 땐 안장이 날아가버린 뒤였다.




배보다 배꼽이 큰 내 자전거는 자전거 차체 가격보다 안장 가격이 더 높았을 정도였는데 그 안장을 빼간 것이었다.



계단 복도에 방치하고 겨우내 들여다보지 않은 내 탓이라 언제 안장이 없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에서 안장 한두 번은 다들 도난당하며 살지 않나 싶을 정도로 빈번하기 때문에 마치 안장을 관리하지 못했다는 책임론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소유자의 잘못으로 느껴지게 하는데 도둑질한 놈들이 잘못인 것이다.


어떻게 달아놔도 도난에서 안심할 수 없다.


레버만 젖히면 빠졌던 안장에서 공구가 있어야 뺄 수 있는 고정형 시트 클램프로 바꿨고 안장은 그냥저냥 딱딱한 일반형 안장을 골랐다.


앞바퀴도 손을 좀 보고, 했더니 42,000원이 뭉텅 나가버렸다.



자전거에 겨울잠을 깨웠으니 곧바로 달려보고 싶어 졌다.


개천가를 달리면서 역시 예전 안장이 좋았다는 사실이 확연하게 느껴져서 엉덩이가 유난히 아팠다.


서호공원에 도착해 자전거는 잠시 매어 두고 공원을  산책했다.



주로 밤에 왔었기 때문에 햇살 받은 서호천이, 저수지가 이렇게 반짝거리고 있다는 게 낯설면서도 뭉클하게 했다.


회사가 아닌 평일 낮의 풍경이 이러했구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원을 걷고 있었고, 새들도 잔물결도, 갈대도 공원을 지키는 낮의 정령들처럼 느껴져 문득 찾아온 시간의 이면으로 초대받은것 같았다ㆍ

물에 반사된 빛이 눈앞이 째랑 째랑 가릴적엔  황홀했다.


순간이 참 좋다가도 이 시간에 내가 여기 있어도 되는지, 돌아갈 문은 아직 열려 있을지 알 수 없어 더 아득하게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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