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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물고기 Mar 22. 2020

20년 친구와의 절교

절교라는 단어를 쓸 줄이야

친구의 연락을 차단했다.


카톡, 전화, 인스타그램 메신저까지 닿을 수 있는 연락망은 모두 거절의 다짐을 세웠다.


본격적인 친구가 된 건 20년 전 중학교 2학년부터였고 그전부터 같은 동네에서 오가며 얼굴은 알던 사이였기 때문에 언제부터 내가 그 친구를 알았던가 떠올려보면 말도 못 하게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느낌이다.


내가 살던 전셋집에 그 친구를 불러 같이 살기도 했었다. (이때도 휘청했던 갈등의 골이 있었다)


데면데면하게 가깝지 못한 날도 있었고 또 한때는 각자의 집안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이 친구야 말로 평생 내 곁에 있어줄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적도 있었다.


가까웠다 멀어지는 유동적인 관계의 거리감도 그려려니 통달하게 되는 ' 당연한 ' 친구의 궤도로 올랐었다고 생각했다.


차단망을 쌓고 씩씩대고 있는 지금 촘촘히 기억을 떠올려보니 크고 작은 갈등을 서로 충분히 풀어내기보다는 알고 지낸 '시간'의 힘을 더 믿었으며 우리 사이에 뭘~이라는 뭉뚱그린 안일함이 차곡차곡 쌓였었던 게 아닐까 싶다.


함께 월에 얼마씩 돈을 모아 문화계를 만들어 같이 뮤지컬, 연극을 보러 다니고 아기자기한 소품샵을 구경하길 좋아하던 우리는 점점 관심사가 달라고 계는 깨졌다.


친구는 다양한 사람과 어울리길 좋아했고, 술을 잘 마시게 되었고, 나는 점점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이 불편하고 시끄럽고 어두운 곳은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서로의 관심사가 달라지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적어진다고 해서 문제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문제라고 의식한 순간 그 시점부터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고 이후의 노력은 어쨌든 서로의 희생을 요구하는 애씀 것이다.


그때의 내 노력은 왜 알아주지 않냐며 대가를 상대에게 서운함으로 요구하는 날은 분명 온다.


낯선 사람 여럿이 빙 둘러앉아 몸이 베베꼬일 것 같은 자리에 있는 게 힘들다고 분명 직, 간접적으로 여러 번 표현했음에도 그 친구에게는 이런 나의 성정이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부분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몇 번의 거절에도 계속 부르고, 밤에 전화를 했던걸 보면.


(난 전화를 거의 받지 않는다. 용건이 없는 전화통화는 숨이 막힌다)


다름에 대한 존중을 받고 싶었고, 나도 사람들에게 몽매한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기를 멈추고 싶었기 때문에  그 친구의 밤문화는 알아서 잘 즐겨주기를 바랐었다.


 ' 일주일 전에 카톡을 보냈는데 왜 답장이 없냐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냐, 10대 20대 정도나 되면 이해를 하지, 지금 나이 먹고 이게 뭐하는 짓이냐 네가 나에게 했던 만큼 나도 똑같이 연락을 안 할 것이다 '라는 따발총의 카톡을 보고 이성의 끈이 팽팽한 활시위처럼 당겨졌다.


제발 술 쳐 먹고 남자랑 노는 자리에 나 부르지 마  진짜 한심해 보여 라고 썼다 지웠고


'네 마음대로 생각하고 니 기분 잡친다고 분풀이하듯 감정 나한테 쏟아내지 말고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다른 거 같으니까 각자 잘 살자'라고 적고 카톡방을 나온 뒤 수신차단을 했다.

 

그 긴 세월을 친구로 지내왔지만 더 이상 알아온 시간에 막강한 면책을 주고 싶지 않았고, 더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서늘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ㆍ


요 근래에는 내가 그 친구의 술자리용 백, 액세서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불편했었다.


서로 함께하고 싶을 때 만나면 되는 건데, 꼭 자신이 있는 유희 자리로 불러들여, 사람을 앞에 세워두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칭찬들을 했다.


' 여기 모임 사람들 다 알코올에 환장한 사람들 같아 그러니까 나 부르지 마 '

' 나 세워두고 책 많이 읽는다, 공부 잘했다 이딴 개소리 좀 하지 마 '라고 꼭 직접적으로 말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 그래 , 여기 사람들 다 괜찮은 것 같아 그런데 내가 술을 잘 못 마시고 숙취가 심해서 이런 자리는 힘들다, 그리고 책도 한 달에 한 권 읽을까 말까고 2년제 전문대도 겨우 졸업했으니 그런 칭찬은 안 해줬으면 좋겠다 ' 고 말했고 꽤 확실한 의사표현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반복되고 있었고, 그 친구의 부름이 무얼 말하고 싶은지 예상되기 때문에 거리를 두고 싶었다.


3월 초 그 친구의 생일도 축하해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개인 신상 문제와 함께 지쳐 있었다.


내 핸드폰이고 내 자유로 다루는 기계인데 그 친구의 연락에 재깍재깍 답하지 않는다 해서 30대엔 저지를 수 없는 철없는 짓으로 치부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당장 자신이 화가 난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그 날것의 울분을 모두 드러내도 되는 건지 그게 맞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식으로 그 친구를 몰아세우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나중 그때는 말이 심했다, 미안했었다며 살갑게 몸을 부대껴 올 텐데 그런 행동이 더 소름 돋고 께름칙할 것이다.


정말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이었다면 감정을 전달함에 있어 더 조심스럽고 어려웠어야 한다.


나는 회피형의 인간임을 인지하고 있어, 모든 사건의 잘잘못을 나에게 반이상 책임을 묻고 들어가는 경향이 있지만 이 친구에게는 얼마큼 나의  힘듬과 이해를 구걸했어야 그 친구의 이치에 맞는 도피였을까 싶다.


상처 주는 말을 하고 싶지 않기에, 아직 적당한 표현을 고르지 못했기에, 생각을 다듬을 마음의 방이 지금은 없기에, 차라리 침묵을 지키고 싶은 사람도 있다.


친구의 성정과 같은 사람들은 답답해 복장이 터진다며 그 속 좀 까뒤집겠다며 달려들곤 하는데 제발, 정말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기식대로 어떻게든 바꿔 놓으려는 폭력성은 결코  자랑이 아니다.


그대들이 타인은 지옥임을 실감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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