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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증후군의 제주표류기
3. 우중행
올레12코스(무릉-용수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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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물고기
Apr 17. 2020
첫날은 10시간을 한번도 뒤척이지 않고 숙면을 취했지만 둘째밤은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신체를 피곤하게 만드는 방법이 반드시 수면을 보장해주진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충분히 걸었고 충분히 피곤했음에도 마음에 근심이 들어차기 시작하니 걷잡을수 없을 정도로 불안함이 퍼졌다.
17키로를 겨우 걷고 난 감회랄까 근심의 시작은 새끼 발톱이 점점 더 심하게 아파온다는 것이었다.
' 내일 잘 걸을 수 있을까?'
'계속 통증을 가지고 어떻게 걷지, 아프다 무섭다'
무릎과 다리는 참을만 했지만 발톱의 통증은 걸음 걸음 게속 신경을 짓누르고 있었다.
내리막길에 도달하면 체중이 앞으로 쏠리기 때문에 발톱은 더 아파왔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차라리 모로 누워 굴러가고 싶을 정도였다.
발가락에 통증 촉수가 자리를 깊게 또아리 트는 중이고, 이제 겨우 걷기 둘째날인데 고난은 참 빨리도 찾아오는구나 싶었다.
숙소에서 눈을 떴을 때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었다.
전날 비소식을 예고 받았었지만, 이 정도의 흐림이라면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을것 같았다.
숙소 바로 옆건물에서 아침을 먹었다.
이 시간을 참 기다렸었구나, 하루의 시작을 준비하며 한알 한알 꼭꼭 씹는 기쁨을 잊고 살았던것 같다.
매일 집을 나서야 할 곳이 없어진 뒤로는 아침을 챙겨먹는 일도 소흘해질 뿐더러 아침에 일어나는 일조차 지키지 못할 때가 많았다.
12코스의 시작점이 가까워오면서 버스 창문을 세차게 두드리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의를 따로 가져오지 않아, 기본으로 제공되는 우의를 입었다.
꼼꼼하게 비옷을 챙겨온 사람들의 옷은 한눈에 보아도 탄탄하고 빗방울이 한틈도 스며들것 같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무료 지급 우의는 얇은 비닐봉지를 넓게 펼쳐 놓고 단추 몇개 달아둔 정도였다.
이번에는 꽤 가방을 잘 꾸렸다고 생각했었는데 헛점 투성이였다.
대체 뭘 넣었다고 캐리어는 13kg이나 되었으면서 우비도, 햇빛을 가려줄 벙거지 모자도 없이 왔는지 모르겠다.
길을 걸을때 내 몸을 보호해줄 장비를 필수템으로 여기기 보다는 적당히 참고 걸을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준비물 차이로 밖엔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우의 모자가 바람에 자꾸 뒤로 넘어가 양손으로 잡고 걸어야 했다.
가드를 올린 동작처럼 말이다.
바람이 조금 얕아지면 그때 팔을 쉬게 할 수 있었다.
우중속 비옷 하나만 걸쳐 입고 걷는건 처음이었다.
빗방울의 세기에 따라 얼굴에 와 닿는 감촉이 부드럽다가도 따가웠다.
누군가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만져본 적이 언제 였나 , 내 얼굴에 닿던 손길의 감각을 떠올릴 수 있을까.
생경한 경험을 따라 기억도 비를 따라 갔다.
말랑해진 길에 발을 대딛기 어려울 땐, 앞사람의 발자국을 유심히 보게 된다.
어느곳을 딛고 다음 발은 어디를 향할지, 진흙에 빠지지 않고 걸음이 게속되는지를 본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나의 뒷모습을 보고 따라올 사람을 생각하며 신중하게 발을 딛는다.
중간 스템프 지점인 선경도예에 도착해 숨을 고르고, 점심을 먹었다.
고구마,삶은 달걀,요구르트와 바나나를 앉은 자리에서 해치웠다.
요즘의 제주도는, 특히 오늘의 제주도는 참 고요했다.
빼곡히 들어찬 출근길 지하철의 사람들, 아파트의 층과 층사이, 도로의 줄지어가는 자동차 등에 숨막혀 했으면서 길들여지기도 했다.
도심생활의 피로함을 상극의 고요가 달래줄수 있는것일까?
친구는 아무도 없는 숲속 어디쯤에 혼자서 지내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그 말을 했던 친구를 떠올리고,
그 친구와 의도적으로 연락을 끊었던 내 편협함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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