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순환

올레13코스(용수-저지올레)

by 사막물고기


어제의 기록을 반성한다.


걷는 동안에는 수십가지 생각과 글쓰기 내용을 골라두었지만 막상, 기록을 위해 사진을 첨부하고 생각을 정리하면서 더 뒤죽 박죽 엉켜버렸다.


무엇보다 양쪽 새끼발가락이 계속 아팠다.


어제의 비로 등산화가 흠뻑 젖었고, 차라리 질퍽질퍽한 양말을 신는 것이, 불붙은 통증을 조금이라도 가라 앉혀주는것 같아서 약간의 도움은 되었지만 갈수록 통증이 심해지는것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커져가고 있었다.



폭풍우가 몰아쳐 오는것 같은 드센 파도를 보면서 떠올린 생각, 부딪쳐 깨져보라고 던져둔 감정들은 아, 발가락 아프다 걷는게 힘들다라는 신체 고통에 묻혀버렸다.


햇빛을 가려줄 모자가 없는것과, 계절과 뒤떨어진 옷도 걱정스럽긴 마찬가지였지만 발의 통증이 가장 큰 문제였고 이 부분만 괜찮아지면 다른 불편함은 모조리 감수할 수 있다는 서약서라도 쓰고 통증을 물리고 싶었다.





매일 매일 순차적으로 돌아가는 코스 일정이 있기 때문에 하루도 멈출수가 없다.


발이 아픈데 어쩌겠어


그렇게 또 어쩔수 없었다는 핑계를 꺼냈다간 제주에 온 목적이 빛을 잃을 것이고 익숙한 패배감이 나를 더 비참하게 했을것이다.


차라리 퇴로가 없는 길로 내몰리고 있는게 지금은 도움이 되고 있다.

고기와 김치전을 맛볼 수 있어 행복한 아침 식사였다.


어제의 길이 끝난 곳은 오늘의 출발지가 된다.


피로를 회복하고 다시 이어 걸을 수 있는 이 종주길의 호흡을 사는 동안에도 잊지말자고 다짐한다.



바지런히 걸어야 할 때와 인생의 시기는 있지만

숨을 고르고, 한숨 길게 잔 뒤 중간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 시작하면 될 것이다.



용수 저수지에서 낚시하는 아저씨의 뒷모습과 여러대의 낚시대를 걸쳐 놓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도란 도란 얘기를 하며 함께 걷는 사람도 있고,


일정 거리를 두고 홀로 걷는 사람들도 있다.


올레길에는 후자의 사람들이 더 많은 편이지만 몇걸음 멀리서 보면 다 함께 길을 가는 일행처럼 보인다.


거리두기를 원하는 사람,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겠지만 불변의 상수는 아닐 것이다.


낯선 사람은 불편하고, 알아온 사람은 더 많은 이해를 요구하는것처럼 느껴졌었다.


앞으로의 관계를 정비하기 위해 힘을 쏟기 보다는 그런것조차 피곤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멀리하고 피했었다.

그래서, 모든 대화를 거부한 고립이 내가 원하는 바였는지 묻고 또 물어보았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답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조차도 대단한 마음가짐이 필요할 것 같았다.

한때, 육아 교육 프로그램을 보면 훈육의 방법으로 '생각하는 의자'에서 반성하라며 타이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내가 무얼 잘못했는지.

어떻게 사과해야 하는지.

앞으로 개선할 수 있는 점은 어떤건지.



의자에 홀로 앉는 것부터 시작해 스스로 유추하고 생각하는 힘을 기르기 위함일 것이다.

중간 스템프가 있는 아홉굿 의자마을은 수십개의 다양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앉을 곳이 많아서 좋았지만 1인분의 의자를 보면


뭔가를 반성하고 회개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신발을 벗고 발에 볕을 쪼이면 발에도 숨구멍을 열어주는것만 같다.


긴 시간을 걸으면서 발과 다리의 피곤함에 대한 고찰은 끊임없이 떠오른다.



매일 매일 반복되지 않는 길을 걸어가는건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기회다.


보통은 매일을 쳇바퀴 구르듯 비슷한 나날을 반복하고 있고, 짬을 내서 산책하는 나의 방식도 자주 가는 공원을 뱅글 뱅글 돌고 있으니 말이다.

굴레를 벗어나 새롭고 신선한 일을 시작하는것이 참 어려웠다.


도전보다는 안정에 기반하여 살고 싶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나의 평화를 지키는 방법처럼 사용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매일 한코스씩 걷고, 올레 스템프를 찍는것도 일상보다 약간 더 커진 굴레의 시작 수도 있다.

그렇게 점차 더 큰 원을 감싸 나가다보면 삶과 죽음 생애의 순환도 느릿하게 굴러가는 큰 굴레일 것이다.

결국 자연의 섭리 아니겠는가.


자연 안에서 크고 작은 나의 원들을 회복시켜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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