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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증후군의 제주표류기
6.푸릇푸릇
올레14-1코스(저지-서광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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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물고기
Apr 21. 2020
혼자서 사용하던 숙소에 룸메이트가 들어왔다.
그동안의 홀가분한 잠자리에 대한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지만 다른 투숙객들도 똑같이 적용받고 있을 숙박비용 형평성에 대한 미안함은 털어낼 수 있어서 좋았다.
룸메이트는 1년간 휴직을 얻고 갑상선 수술을 한 뒤, 회복기를 거치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고 싶었다고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출국이 여의치 않았고,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올레길 완주라고 했다.
조기 발견으로 다행히 완치하기까지 어렵지는 않았으나 그동안 건강문제에서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 일로 그 믿음이 얼얼히 흔들린것 같다고 하셨다.
간단한 대화로 깊이 알지 못할 이면의 고통과 투병에 마음속으로 위로를 보냈다.
조용하고 차분한 분이셔서 내 룸메이트가 되어준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룸메이트도, 나도 무사히 올레길 완주를 마칠 수 있기를 다시 한번 기도했다.
고기를 좋아하는 나는 조식에 조금이라도 고기가 들어있으면 맛있는 밥상이 되었지만,
"아 오늘 먹을거 진짜 없네 " 라며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분은 아침부터 허기가 진다고 했다.
건강 문제상 고기를 먹을 수 없다고 하셨다.
나의 단순한 기쁨 뒤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이 있다는걸, 잊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많은 분들과 얘기를 나눈건 아니지만 크고 작은 병치례 뒤에 올레길을 걷는다는건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걸까.
건강함의 척도가 바로 두다리로 오래 걷을 수 있다는것, 따라서 길 위에 다시 서게 해주심에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계속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다짐하는 의식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출발지 근처에서는 먹구름이 채 가시지 않은 흐린 날이었지만 걸음수를 보탤 수록 날이 맑아졌다.
오늘은 총거리 9.3km로 어제보다 반절 정도짧은 거리였다.
그래서 일까 다들 발걸음에 힘이 넘쳤다.
저지리 알못, 강정동산을 거쳐 문도지 오름에 오르는데 오름을 오르는 동안 외에는 거의 평탄한 길이 계속되었다.
오름을 올라가면서 내가 오름을 올라가는건지 말똥밭을 지나는 건지 모를 정도로 말똥이 많았다.
동글동글 조랭이떡 뭉쳐 놓은것 같은 말똥은 더럽다는 느낌보다는 찰흙놀이를 하다 팽개치고 도망간 개구쟁이들을 떠오르게 했다.
완만한 오름을 올라, 말똥의 주인들 말 세마리가 오름의 수호신들처럼 앉아있었다.
탁 트인 하늘과, 곶자왈을 내려다볼 수 있는 경치를 보니 가슴속에서 뻥뻥 숨을 터주는 소리가 들릴것 같았다.
매일이라도 오를 수 있을 것 같은 그다지 힘이 들지 않는 오름이었다.
아주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만 굽어볼만한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던 이전 경험과 다르게 오름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제주의 오름은 모두 올라봐야 한다고 하는가보다.
천천히, 설겅 설겅 뒷짐지고 올라도 하늘과 바람을 가득히 안으며 발밑으로는 푸르름을 딛고 있을 수 있다니.
짧지만 가장 충만한 시간을 선물받는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문도지 오름을 내려와 중간 스템프를 찍고, 가다보면 곶자왈길을 지나간다.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한 소녀의 내면에서 숨쉬는 감정세포가 의인화 되어 어떤 역활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는데
곶자왈 길을 걸을때면 마음속 그늘 어딘가로 걸어가는것만 같다.
나뭇잎을 소소소소 흔드는 바람소리는 바위에 부서지는 바닷소리를 닮았다.
그래서 바다가 머리 위로 떠있고 그 아래가 숲이라고 믿고 싶어진다.
정돈되지 않은 날것의 길을 따라 굽이 굽이 들어가면서 내 발자국과 숨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곶자왈에 오랜시간 머물다보면 현실에서 점점 멀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도 세상을 잊고, 세상도 나를 잊고..
위험하면서 환상적인 곳이다.
곶자왈에서 빠져나오면 오설록 티뮤지엄에 당도하면서 14-1코스는 끝이 난다.
저렴하지 않은데, 이곳에 오면 꼭 뭐를 먹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며칠걷다보니깐, 빨리 걷는사람들, 다소 천천히 걷는 사람들의 특징이 보인다.
단순히, 누가누가 더 빨리, 잘 걷나하는 기록 경쟁이 아님에도 잘 걷는 사람들을 부러워 하는 무리들도 있었다.
모두 다 함께 출발하지만 도착하는 시각은 천차만별이다.
어차피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 출발 시간이 있기 때문에 그 시간에만 맞춰서 도착하면 된다.
앞, 뒤에 사람이 있더라도 쫓아가지않고, 쫓기는 기분이 들지 않게 나의 시간을 찾아, 걷는 순간 순간 깊이 만끽하며 걸어보고 싶다.
나의 흐름을, 속도를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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