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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증후군의 제주표류기
10. 갈증
올레18코스(제주원도심-조천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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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물고기
Apr 25. 2020
대부분은 사람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대화 없이 홀로 걷거나, 뒤로 쭉쭉 쳐지는 바람에 인적없는 길을 걸을 때가 많다.
하지만 간간히 말을 걸어와 주는것도 꽤 반갑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대화의 시작, 물고를 트기 위해선 작은 공통점을 찾는것으로 시작한다.
공통점은 낯선 벽을 허물고, 이해받을 수 있는 존재임이 부각된다.
내 룸메이트분은 같은 세례명을 쓰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려다 올레길로 선회한 공통점을 가진 분과 친해지셨다.
나는 2월말경 회사를 그만두고 두달여간 백수로 지낸 공통점이 있는 분과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지금까지 걸었던 길 중 가장 많이 걸었던 날이다.
제주원도심에서 시작하여 조천으로 이어진 18코스는 무려 19.8km나 된다.
18코스 보다 긴 올레길이 앞으로도 몇 개 남아있기 때문에 그만한 거리를 감당할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는지 오늘의 길로 물음을 받았고,
대답은 역시 힘들고 고되고 지친다이다.
점점 양이 많아지고 있는 조식을 먹고, 18코스 출발지인 동문시장에 도착했다.
제주에 있다보니까 육지의 나의 집근처 날씨는 어떨까, 이 곳과 비슷할까 집에 별일은 없을까 슬슬 궁금해지고 있었다.
그런중에, 도심 냄새가 물씬나는 동문시장에서, 사람,차,물건 구경은 익숙한 정취를 느낄 수 있어서 갈증이 조금은 해소될 수 있었다.
시장에서 나와 김만덕 객주터, 제주연안 여객터미널쪽을 지나는 길은 4년전에도 걸었던 길이라 어렴풋이 지나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초입부 이후 길은 모두 새로웠다,
사라봉에 오르는 길이 꽤 힘들었다.
하지만, 안전하게 오를 수 있도록 잘 닦아 놓은 길과 연두 빛 레이스 커튼같은 잎들이 드리운 그늘 덕분에 오르는 걸음 걸음이 행복했다.
이마가 땀으로 젖어 흐를새라 달큰한 바람이 식혀주었다.
사라봉 정상에 올라 내려다 본 바다에는
제주 항만업의 축소판을 보는것 같았다.
간세 표식이 잘 매달려 있긴 하지만 가끔 방향이 헷갈릴때가 있다.
헷갈려 하는 여행객을 알아차린 주민분들은 자주 도움을 주시는 편이었다.
오고 갈때 눈이 마주치면 나누는 인사, 사소하지만 감사한 도움들이 길에서 피어나는 온기를 느끼게 해준다.
사라봉에서 내려와 화북포구쪽으로 넘어가는 산막이길이 참 정겹고 좋았다.
오늘이 제주에 온지 11일째였다.
처음 한두날은 다리는 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지만 머리와 가슴은 탱탱한 고름으로 꽉 차 있는것만 같았다.
자연과 생명의 어여쁨을 뽐내고 있는 경치들 앞에서, 내 속이 들끓고 있다며, 앓는 소리를 뱉어냈고 그렇게 털어내듯 나머지 코스들도 걷게 될 줄 알았다.
요즘은 별 생각없이 걸을 때가 많다.
머리와 마음을 헤집어 경치속에 풀어낼만한 넋두리도 없었고, 부러 무슨 생각을 해보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걷는사람의 생존 욕구가 비워짐이라면 그 목적에 벌써 가까워진게 아닐까?
반대로, 각성하는 인간으로 향하는 길이고자 하면 무던함으로 역행하고 있는 꼴이었다.
나쁜길, 좋은길은 없었다.
그저 내가 가본길, 가보지 않은 길 사이에서 느리지만 꾸준히 꼭꼭 밟아 갈 길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검은모래로 유명한 삼양해수욕장 끝지점에서 돌로 쌓은 둔턱에 앉아 발을 담궈, 찰방 찰방 물장구를 치고 싶었다.
신촌가는 옛길을 지나 닭모루에 당도했을쯤엔 오른쪽 발가락에도 물집이 잡히는게 느껴졌다.
왼발 세번째 네번째 발가락은 매일 물집이 잡히고 터트리고를 반복하며 물집에 절여진 발가락이 되어가고 있었다.
길을 걸으며 별 생각이 없어지는 것엔 발이 아프고, 다리가 아프고 몸이 힘들어지는 원초적 본능이 크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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