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선물

올레20코스(김녕-하도올레)

by 사막물고기

오늘의 기록을 시작하기 전, 살짝 취중상태인것을 고백한다.



숙소와 가까운 올레길 코스들을 걷기 시작하면서 부터 숙소 복귀 시간이 빨라지고 있었고,


치킨과 막걸리를 먹어야 하는 간절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지나칠 수 없어 해가 짱짱히 떠있는 오후 3시경 부터 막걸리 한병과 옛날 통닭, 양념 똥집을 먹었다.

거의 일주일째 변을 잘 보지 못하고 있음을 한분께 은밀하게 고백하고 있었는데 뒤따라 오시는 선생님께서 유산균 막걸리의 침전물은 먹지 않고, 맑은 윗 부분만 먹으면 변비에 직빵이라고 일러주시는거다.


그렇다면 먹지 않을 이유가 없고, 막걸리를 마신다면 치킨 정도는 먹어줘야 하지 않겠냐며, 오늘의 20코스를 바싹 걷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치킨을 뜯었다.


아, 이 바삭바삭한 기름기와, 헤실 헤실 풀어지는 알콜의 낭만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듯 싶다.

김녕서포구에서 시작하여 제주 해녀 박물관으로 이어지는 17.6km의 올레 20코스를 걸었다.


길을 걷기전, 대충 어떤 지역을 지나게 되는지, 해안길인지 산길인지 대략 파악하는 버릇이 생겼다.


오늘의 코스는 크게 오르막 길도 없었고, 해안도로와 내륙을 왔다 갔다 하는 코스라 부담없이 걸을 수 있었다.

조식으로 고기가 나오는 날은 꼭 과식을 하게 된다.

숙소 앞 고성5일장이 열리는 날이라 아침을 먹고 구경을 갔다.


사고자 한다면 한라봉, 당근 등 제주 유명 특산품들을 살 수도 있었겠지만, 현금을 챙겨 오지 않아 못살것 같다고 생각하니 마땅히 살만한게 없어졌다.

김녕서포구에서 시작하여 이어지는 김녕해수욕장은 너무 북적대지도 않고, 조용히 발목 정도를 찰랑거리며 적시고 놀 수 있을것 같아서 마음에 쏙 든 해변이었다.

제주의 집들은 현무암 돌담을 활용하여 담의 윗부분을 다육식물로 꾸미기도 하면서 비슷비슷해 보이는 담벼락이지만 저마다의 개성을 엿볼 수 있는 아기자기한 재미가 느껴진다.

김녕 해변, 월정해변의 모래가 보슬보슬하면서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맨발로 다녀도 폭신하게 발을 감싸줄것 같은 무해한 모래였다.

반전의 매력은 지질트레킹을 할 수 있을 만한 거친 돌, 바위 길을 느낄 수 있다는거였다.

발가락이 아프다는 이유로 선택한 스케쳐스는 지질 트레킹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디디는 걸음 걸음 돌 표면이 발바닥에 고스란히 느껴졌고, 발을 아프게 하는 단점이자 발바닥에 독특한 자극을 주는 장점이 되기도 했다.

물질을 하는 해녀도 만날 수 있었다.


숨비소리를 듣고 싶어서 귀를 쫑긋 세웠지만 오늘은 들을 수 없었다.


4년전, 제주 해녀박물관을 다녀 온 뒤로 제주 해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강인한 여성의 자부심 반, 고된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안타까운 여성을 바라보는 복잡미묘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코로나 여파로 올레 20코스 종점인 제주 해녀박물관이 장정 휴무중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잠깐이라도 해녀를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다.

월정 해변에 가까워지면서 아기자기하고 예쁜 소품을 파는 카페, 서점, 음식점들을 연이어 만날 수 있었다.

가게마다 개성있는 컨셉과, 인테리어를 갖추고 있어서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월정해변을 지나 내륙으로 들어오면서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용감한 새를 보았다.


마치 길잡이가 된 것 마냥 사람들 앞에서 도도하게 걸어가는데, 화들짝 놀라며 날아가는 새들만 보다가 이런 새를 만나니 새로웠다.


이름을 알 수 없었다는게 아쉬움이 컸다.

올레길을 걸으며 지나치는 민가에 제집을 지키는 강아지들을 보면 사진을 찍지 않고는 못베기겠다.


왈왈 짖으면서 겁을 주는 강아지들도 있지만 유순해 보이는 강아지들도 많다.


모든 동물은 천사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도착시간을 걱정하지 않고, 소품가게들을 구경하며 여유있게 걸었던 하루였다.


쫒기지 않는 기분으로 내가 원하는 시간만큼 충분히 늘려 쓸 수 있는 여유가 얼마나 행복한 기분인지, 새로운 감정의 문이 열린것 같았다.

길 위에 처음 올라섰을때는 혼란스러웠다.


걸을수록, 내딛는 걸음 걸음 착실하게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고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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