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청보리는 떠나고

올레10-1코스(가파도올레)

by 사막물고기

11코스부터 걷기 시작해, 마지막 10-1 가파도 코스를 걸으면 올레길 완주 증서를 받을 수 있다.


10-1코스를 갔다와, 올레 여행자센터까지 가기에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 일요일 자유시간을 미리 10-1코스 가파도 올레에 가 스템프를 찍는 것으로 보내기로 했다.


숙소에서 가파도로 출발하는 모슬포 운진항까지 1시간 30분정도 걸리고, 버스를 이용한다면 더 오래 걸릴것은 뻔하기 때문에, 함께 승용차로 갈 수 있는 인원이 생겼다는게 무엇보다 기뻤다.

함께 가파도로 가는 여행자 두분은 나보다 나이가 훨씬 지긋하신 선생님들로, 가파도엔 이미 다녀와봤으나 이맘때쯤의 가파도가 궁금하여 한번 더 방문하시는 분들이었다.

오늘도 날씨가 흐렸다.


아침 9시 여객선은 기상악화로 결항이었고, 내가 타고자한 11시 여객선은 제발 정상 운행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비행기가 뜨고, 배가 뜨는것에는 비가 내리는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안개와 구름으로 시야확보에 문제가 없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알려주셨다.


그러면서 " (내이름) 이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 라고 타박 아닌 타박을 들었는데 동년배, 직장 동료에게 들었다면 나를 무시하는게 아닐까, 쉽게 보는게 아닐까 등등 온갖 확대해석으로 지쳤을 법이 뻔한 말이었지만, 나를 잘 모르는 어른에게 들으니 가볍게 흘려버릴 수 있는 말이 되었다.

그동안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얼마나 곤두서있었는지, 날 선 망상과 오해로 스스로를 얼마나 괴롭혔었는지 깨달았던 지점이었다.

알고 지낸 세월이 길다고 해서, 나를 더 잘 이해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나 또한 마찬가지로,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주지 못했었다.


어차피 우리는 서로를 바닥 깊숙히 이해할 수 없어 상처를 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면 만난지 얼마 안된 사람이라 저지를 수 있는 실수에 관대해지는 것처럼 기대를 낮추고, 낯선 긴장을 유지해보자고 마음먹었다.

가파도에 도착해, 간세 이정표를 찾아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4년전 가파도에 늦은 배시간으로 들어온 나머지 하룻밤을 자고, 제주도로 나갔던 기억이 새록 새록 떠올랐다.

그때의 가파도와 지금의 가파도가 나란히 기억의 도마에 올라 비교되고 있었는데,


정식 민박도, 숙박도 아닌 집에서 잠을 잤던것과 다르게 지금의 가파도는 게스트 하우스, 카페, 음식점이 제법 스산하지 않게 예쁜 모양들을 갖추고 있었다.

가파도에서 자고 나가게 되었다는 말을 엄마에게 했을 때, 우도나 추자도도 아닌 웬 가파도에서 잠을 자냐, 볼것도 없지 않느냐 라는 말을 했었다.


그땐, 햇빛을 받으며 찬란한 녹색을 발산하는 청보리 외에 해가지면 정말 볼것이 없었기 때문에 집을 그리워하며 훌쩍 거렸으나,


지금의 가파도라면 하룻밤 묵어도 볼만한 것들이 좀 있다고 받아칠 수 있을것 같다.

청보리 소프트 아이스크림, 청보리 핫도그 등등 청보리가 가파도를 대표하고 있은지는 오래 되었지만 그 이름으로 다양한 음식을 판매하고 있을 줄은 몰랐었다.

또, 가파도는 제주에서 가장 나지막한 섬으로, 날이 좋으면 한라산,산방산, 송악산 등 6개의 산을 볼 수 있다고 하나, 오늘은 짙은 물안개와 쿰쿰한 먹구름만 가득 느낄 수 있었다.

날이 좋으면 좋은대로, 궂은 날은 그런대로 모든 여행의 시간과 날씨의 합은 새로운 인연이 된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일정을 틀어, 가파도에 오게 된것도, 낯선 여행자 두명과 동승하게 된 것도, 물기 잔뜩 머금은 하늘 아래 낮은 섬을 걷는 것도, 오늘의 내 선택과 날씨가 만들어준 시간일 것이다.

안락함과 편안함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는 나는 '집나가면 고생'이라는 말을 농담 조금 진담 꽤 많이의 비율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집을 나와 떠돌아 다닐 적엔 그 누구보다 고생 앞에서 용감하고, 참을성과 인내심이 발휘되는 기특한 모습을 느끼곤 한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의 모험담을 전해들으며, 그들을 동경하고 따라가고 싶은 충동이 부글거릴 때면, 어쩌면 난 집나오기까지가 힘든 사람이지, 나오면 고생을 즐 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가파도는 청보리가 유명하지만, 청보리가 한창인 4월이 지나니 황금보리가 넘실 넘실 올라오고 있었다.

청이 아직 다 물러가지도,

그렇다고 황금색이 온전하게 덮이지도 않는

과도기의 보리가 열성적으로 고민하느라 얼룩 덜룩한 밭으로 뒤덮인 곳이 많았다.

늘 중간의 정체성을 지향하고 있다.


그래서, 푸릇하지도 누릇하지도 않는 지금의 보리밭이, 축제 홍보문구로도 쓰이지 않을 지금 시기의 보리밭이 내 마음속에 담겼다 나온 색같아서 친숙했다.

천천히, 보리밭 사이 사이 길을 왔다 갔다 한다.


에메랄드의 성에서 심장을 가진 사람으로 소원이 이루어진 허수아비가 된 것처럼, 참새가 앉지 못하게 쪼지 못하게 움직임을 과시한다.


허수아비의 당당하게 걷는 길,


허수아비의 꿈의 런웨이가 연출된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다.

두어번 밖에 반복되지 않아서 습관으로 굳어졌다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조심성을 둘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게, 올레길 완주후 마시는 막걸리 혹은 맥주다.


바짝 힘을 주고 걸었던 긴장감이 알콜과 함께 탁 풀리는 해방감이 짜릿했다.


그 맛이 중독될까 무서워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청보리 막걸리는 기존 막걸리 보다 더 순하고 유들 유들한 맛이었다.

막걸리로 달아오른 열을 시키려고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카페에 갔다.

작고 가벼운 몸놀림으로 폴짝 탁자위로 뛰어오른 삼색냥이는 아이스크림을 홀짝대며 잘도 먹어댔다.


그 모습이 귀엽고 맹랑해서 카메라를 연신 눌러댔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목공예에 힘을 쏟는다는 친절한 주인분이 설명해주시는 가게도 구경했다.


더 들여다보고 싶은 가게와, 벽화, 골목이 많았지만 돌아가는 배편 시간이 다가와 허겁지겁 포구로 달려갔다.

대책없이 잘 곳도 정하지 않고, 가파도에 들어와 두리번 거리던 4년전의 멍청이는 다채로운 색을 입고 한결 더 밝아진 모습으로 관광객을 맞는 가파도처럼 달라졌다.


이래도 예쁘고, 저래도 아름다운 자연을 사랑하며 자신이 본 하루의 멋과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막걸리 맛을 조금 아는 어른으로 바뀐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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