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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증후군의 제주표류기
19. 폭신폭신한 길
올레2코스(광치기-온평올레)
by
사막물고기
May 4. 2020
어제 제주도는 비가 내린 곳도 있고, 운좋게 비를 피해간 나 같은 여행자도 있었다.
하지만 애초엔 모든 지역에 비를 뿌리기로 작정했었다며 분이 가시지 않는 듯한 먹구름과 습도의 여파가 오늘 오전까지 이어졌다.
집에 있을 때보단, 덜 먹고 많이 걷는 편인데 제주에 있으면 눈두덩이가 터져나갈듯 부은 상태로 눈뜨게 된다.
얼굴로 모든 습기를 빨아 들인것처럼 무겁고 퉁퉁하게 아침을 맞는다.
한번도 얄쌍했던 외모를 가진 적은 없지만 만약 제주도에 오래 살게 된다면 점점 더 못생기지고 둥실 둥실 불어갈 것 같은 느낌이다.
올레2코스는 15.2km의 거리지만 현재 녹지공간 조성사업으로 둑방길이 통제되어, 초반 2km는 지나갈 수가 없었다.
식산봉 입구이자 오조반점 음식점에서부터 출발했다.
광치기 해변을 구성하는 현무암 지질이 카메라 하단에 걸리며, 멀리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아침 풍경이 신성해보였다.
족지물을 지나는 길에 산책하는 동네 강아지를 보았다.
시츄와 다른 종류가 섞인것 같았는데, 시츄거나, 시츄가 조금이라도 섞였거나, 시츄를 닮은 강아지를 보면 동글이가 생각나 두근거린다.
시츄끼리는 닮지 말래도 조금씩은 닮아 이어진 형제 자매들 같다.
보들 보들한 털을 만져주었고, 따뜻한 온기가 감도는 강아지의 등판이 순간 감격 스러웠다.
재미난 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담수처럼 낮게 들어온 저수지 그 주변의 잘 닦인 산책로를 따라갈 수 있기도 하다가,
거칠고, 발목이 흔들거릴 주의를 요하는 날 것의 길을 따라 걷기도 했다.
성산일출봉을 끼고 걷는 길이면 숙소와 가까운 길들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한주 한주가 지나가면서 성산, 고성쪽은 이제 동네 같은 느낌이 들고, 광치기 해변쪽은 동네 산책하듯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나의 소망은 바닷가를 매일 산책 할 수 있는 곳에 집을 가지는 것이었는데, 정식 집은 아니더라도 이 곳 제주 한달 살이에서 짧게나마 충족하고 있는 중이었다.
오조리 마을회관과 중간스템프 지점인 동마트를 지나, 대수산봉에 올랐다.
2코스 초반부에 있었던 식산봉과는 다르게, 가파른 오르막을 구불 구불 길게 올라가야 했다.
습한 산속엔 짙은 풀내음이 그윽하게 올라왔다.
코를 얼마나 벌렁거렸는지 모르겠다.
가슴 깊숙이 숲의 향기를 모두 끌어와 폐를 파랗게 물들이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냄새였다.
비온 뒤 , 촉촉하게 젖은 흙길은 폭신 폭신 했다.
오늘은 딱히 밑창이 두터운 신발도 아니고, 발을 보호해주는 등산화도 아닌 일반 운동화였지만 발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느낌이 들었다.
발가락 통증, 고관절 통증 등등 모든 아픔을 폭신한 흙길이 흡수해주는것 같아 신나게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대수산봉을 내려와 혼인지로 가는 길의 후반부는 햇빛이 드센 힘을 자랑하고 있었다.
바람과 해가 나그네 옷을 벗기기 위한 싸움을 하는 동화가 떠올랐다.
제주는 바람도 많이 불고, 하늘 아래 걸림 없이 곧바로 떨어지는 빛도 드세기 때문에 이 둘의 싸움 접전지가 아닐까 ?
더웠고 땀은 삐질 삐질 났지만 장갑, 긴팔, 모자로 최대한 빛을 가리기 위해 애를 쓰며 걸었다.
피부에 얼룩덜룩 빛의 그을음이 남는게 싫었다.
그래도, 집에 돌아가면 왜이렇게 탔냐며, 오랜만에 본 사람들은 놀랄 정도로 새까매진 상태이긴 하다.
용감한 바람의 딸들 중엔, 뽀얗고 새하얀 피부를 가진 딸들은 없으리라.
푸른 잔디가 넓게 깔린 혼인지를 지났다.
혼인지는 삼성혈에서 태어난 탐라의 시조 고(高)·양(良)·부(夫) 3신인이 동쪽 바닷가에 떠밀려온 함 속에서 나온 벽랑국 세 공주를 맞이하여 각각 배필을 삼아 이들과 혼례를 올렸다는 곳이라고 한다.
전통 혼례 체험을 할수도 있다.
결혼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누군가와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해 골몰했던 때가 있었다.
사람의 연은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 때가 맞아져야 한다지만 부부의 연은 각별한 하늘의 뜻이 더 필요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애써 고민하는 것도, 바라는것도 부질 없다고 느꼈고 결혼을 관심사로 두는것은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혼인지도 ' 아, 푸르고 예쁜 곳 ' 정도로 건성 건성 보며 2코스 종점인 온평포구로 열심히 걸었다.
찌푸렸다 갠 날씨의 더위가 드세지는 것을 보면 여름이 가까워졌다는 신호일 것이다.
4월, 올레길 초반 쌀쌀한 바람과 함께 걸었던 기억이 생생한데, 벌써 더위와 갈증이 기다리는 오월로 접어들었다.
시간 참, 길 참, 빠르게 닳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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