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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증후군의 제주표류기
22. 이렇게 좋은날
올레5코스(남원-쇠소깍올레)
by
사막물고기
May 7. 2020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길동무가 되어준 아가다 선생님이 떠나자 허전함이 밀려왔다.
대체적으로 수다를 좋아하지 않았고, 더욱이 길에서는 머리가 텅 비워지도록 경치를 구경하는게 좋았을 뿐, 누군가를 알아가고 싶은 욕심은 없었는데 아가다 선생님과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또 자연스럽게 각자의 홀로 걷는 시간을 존중해주는 패턴이 반복됐었다.
선생님의 제주에서의 시간이 어제부로 종료되었기 때문에 길 위의 친구가 사라져 버린것 같은 씁쓸함이 느껴졌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은 곧 뒤따르는 수순이고,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런 순환이 빠른 편이다.
축약된 인생본을 느낀 아가다 선생님과의 15일 이었다.
올래 5코스는 오! 감탄사가 나올만한 아름다운 경치가 이어지는 코스라고 한다.
전날 아가다 선생님과 인사를 나눈 올레길 안내소에서 오늘의 새로운 출발을 시작했다.
남원포구 파도가 얼만큼 빠르게 밀려오는지 지켜본다.
소소소소소 하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이불보를 활짝 들었다 놓았을때의 파동같은 일렁거림이 포근해보였다.
무엇보다 날씨가 무척 좋았다.
아이유의 좋은날 노래가 절로 흥얼거리며 나왔다.
하늘이라는 용액에 사람의 기분이라는 리트머스와 같은 시약지를 똑 담구면 날씨에 따른 기분변화를 관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만큼 날씨와 기분의 변화는 깊은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하늘에 퍼져 있는 구름의 부피, 가벼움의 질감은 방방 뜨는 기분의 무게를 보여주는것만 같다.
스스로 만족하고, 사랑하는 날씨와 기분은 적당히 차분하고, 빛과 어둠이 섞인 날씨지만 가끔은 대책없이 반짝이는 오늘 같은 날이 참 좋다.
해안을 따라 잘 닦인 산책로를 지나가면서 우거진 풀숲 사이로 비쳐들어오는 빛이 유럽의 어느 비밀의 정원을 찾아온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해주었다.
길 끝에 비춰보이는 모양이 한반도를 닮았다고 하여, 한반도 이름을 가진 길을 지나,
머리 위로 드리운 잔가지가 사라졌을 땐 다시 새파란 하늘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하늘 빛과 비교하면 오늘의 깊은 바다는 푸른 빛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바다가 유독 하늘 빛 같을 때가 있고, 하늘이 유독 바다빛 같은 날이 있다.
지금은 철이 아니라, 붉은 동백꽃을 단 한송이도 볼 수 없었던 위미 동백나무 군락지도 거쳐갔다.
아쉬웠지만 다시 코끝 시려운 겨울의 끝자락쯤 동백은 돌아온다고 약속했기에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매년 사람들이 예상할 수 있는 시기쯤에 돌아오는 만물의 순환, 풀과 꽃, 나무가 돌아오는 약속은 참으로 순수하고 착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따끈한 도로에 몸을 지지는 흰둥이와, 마치 흰둥이의 휴식을 지켜주려는 듯한 검둥이를 보았고
둘이라서 다행이라고, 둘이니까 보기 좋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고망물을 지나, 건축학개론 서연의 집이 있는 해안가에 도착했다.
이 전에 방문했을 때는 바다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서연의 집이, 카페로 바뀐 가게가 독특해보였는데, 바다를 창에 낀, 멋드러진 건축미를 자랑하는 카페가 많아졌고, 제주 해안가를 걸으며 계속 보다보니 서연의집은 심드렁해졌다.
가시거리가 길게 내다보이는 오늘은 하늘의 날이었다.
한라산도 뚜렷하게 보였고, 주변 어떤 경치보다 하늘을 걸친 사진이 많은걸 보면 말이다.
아래, 위, 옆 고개를 돌려 바라볼 것들이 참 많았다.
땅만 보고 걷던 도심의 뺑뺑이 산책은 잊은지 오래다.
제주외, 전국 팔도 곳곳에 걸을 수록 빛나는 비경이 숨어져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걷고 있지만 더 많이 걷고 돌아다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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