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우비가 샌다

올레7코스(서귀포-월평올레)

by 사막물고기

제주에서는 기상청 예보가 거의 들어맞는 편이다.


비가 오겠다고 하면, 날이 흐린건 물론, 제주 어느곳에서 잠깐 지나가는 비라도 꼭 내리고 간다.


원래 이렇게 일기예보가 잘 들어맞았었나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았던 기억이 꽤 많이 떠오른다.


올레 26개 코스 중 가장 잘 알려진 길이며, 잘 정돈된 길로 인기가 많은 7코스를 걷는 날에 호우 주의보 경고 문자를 받았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참 좋았겠지만, 지금까지 걸었던 올레길로도 날씨가 많이 도와주고 있었고, 그 많은 맑은 날들 중 오늘 비가 와야 한다면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엄마가 택배로 부쳐준 우비가 있어서 더이상은 빗속 걷기가 두렵지 않다고, 자신만만했다.

칠십리 시공원의 연못에도 빗방울이 세차게 떨어졌다.


넓고, 잘 조성된 산책로가 자랑인 공원인데 빗방울이 얼굴을 때려 고개가 자꾸 숙여졌다.

쇠소깍 다리 아래 물이 거의 말라 있어서 비가 좀 와야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비내리는 오늘 멀리 보이는 천지연 폭포는 풍부한 수량으로 세차게 떨어지고 있었다.

외돌개가 장군바위라고 불리기도 하고, 할망 바위로도 불리는데, 오늘은 거친 파도를 묵묵히 받아내고 있는 장군에 더 가깝다고 느껴졌다.



외돌개 주변길을 따라 가면서, 땀이 나 우비 안에 옷이 젖는 줄 알았다.


자세히보니 우비 안쪽에도 송글 송글 빗물이 그대로 베여나오면서, 방수의 기능이 떨어지는 옷임을 알아챘다.


이래서는 일회용 우비보다 비를 더 막아내지 못했지만 이런 우비라도 벗고 있는것 보다는 입는 편이 나았기 때문에 축축함을 계속 안고 걸어갔다.

돔베낭골 화장실쪽으로 가는 길에는 올레길로 지날 수 있도록 사유지가 허락된 곳이 있다.


푸른 잔디와 넓은 창을 가진 카페가 있었고 거품이 몽글하게 올라간 카페라떼가 먹고 싶었다.


속옷도, 신발도 흠뻑 젖어 꿉꿉한 몸이 계속 무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 선생님은 방으로 몰려든 일곱 아이들에게 폭풍우치는 밤을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이겨내는 방법에 대한 노래를 부른다.


뽀송뽀송한 이불에 두 발을 비비는것,

눈꺼풀이 무거운 강아지를 한팔에 안아 잠이 드는 것,

따끈한 우유에 꿀을 타고 멜로 영화를 보는 것,

한없이 자상한 목소리와 편안한 통화를 하는 것.


내가 마리아가 되어 노래할 때 가사가 될 리스트와, 상황을 상상하며 빗속을 걷는다.

너무도 따뜻하고 온화한 순간들이 머릿속에 펼쳐진다.


때론 눈앞에 다시 없을 순간들을 보고 있으면서도 상상에 의지해야 될 순간들이 있다.

법환포구쪽 편의점에서 라면과 커피를 마시며 몸을 데웠다.


그래도 이전에는 일회용 우의였지만 토독 토독 떨어지는 빗소리와 감촉이 새로웠다며 빗속 산책에서 좋은 면을 찾고자 애를 썼고, 그 편을 들었지만 오늘은 안락함이 그리웠다.

자욱한 안개와, 한없이 나를 작아지게 누르는듯한 근엄하고 웅장한 바다를 보며 꾸짖음을 당하는 것 같았다.


깊이 한번에 크게 밀려오는 파도에 사람하나 톡 떨어진다면 흔적도 없이 집어 삼킬 것이다.


너 하나쯤 지우는건 일도 아니라는걸 보여주는듯이ㆍ

월평포구로 들어서면서 빗줄기는 잠잠해졌다.


우비에 비가 새어들어오지 않았다면 씩씩하게 걸을 수 있었을까?


춥고, 끈끈한 으스스함이 몸에 계속 달라 붙어 있으면서, 생각도 경관을 보는 시선도 몸의 감각에 맞춰 따라간다.


떨어지는 비를 맞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비에 젖는건 위험하다ㆍ


숙소로 돌아오는길은 언제 비가 내렸나싶게 밝아져 있었다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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