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아픈가 힘든가

올레7-1코스(서귀포터미널-서귀포올레)

by 사막물고기

제주에 와서 1-2주는 밤에 잠이 들기 어려웠고, 무엇보다 새벽에 자다 깬 뒤에 다시 잠들지 못해 몽롱한 상태로 아침을 맞곤 했었다.


근 한달이 다되어 가는 요즘에는 잘 자고, 아침까지 깨지 않고 푹 자는것으로 보아 이제 숙소에 적응이 된 것 같다.


만나고 친해질때쯤 다시 이별이고, 내 몸에 익숙 할 때쯤 장소와 물건도 떠나야 할 시기가 돌아온다,


쉽게 친절하지 않고, 아무에게나 호의를 보이지 않는 태도의 저변에는 내가 떠나든, 상대가 떠나든, 언제든이고 보지 않을 사람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제주에 나 같은 애도 먹고 살만한 일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제주에 풀어놓은 짐들이 뿌리를 내리고 숙면을 취하며, 잘 적응하며 내가 선택한 지역의 주민으로 살아보고 싶다.



오늘은 서귀포버스터미널에서 시작하여 올레 여행자 센터로 돌아오는 7-1코스를 걸었다.


걷는 동안 하루가 흐리거나 비가 오면 다음날은 꼭 말갛고 쨍한 햇살로 보답해주는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전날 안개가 자욱한 흐린날의 여정이 끝나고 오늘은 맨눈으로 쳐다보기 힘든 타오르는 태양빛이었다.

그동안은 돌담집, 전통가옥에 사는 제주도민의 집을 볼 수 있었다면 월산동 동네는 제주도에 사는 아파트, 빌라의 주민의 주거지를 볼 수 있었다.


각이 딱 맞게 떨어지는 네모네모 건물들은 늘 보던 것들이라 익숙했지만 자수 나무라던가 헐빈한 자동차 도로, 바다를 걸쳐 올려다 볼 수 있는 하늘 등의 경관은 제주에 왔기 때문에 보는 풍경이었다.


낯선 도화지에 익숙한 건물이 자리를 잡았지만, 한달 쯤 반복해서 보게 된 낯섬은 이미 낯선 것이 아니리라, 그저 제주 서귀포시의 한 도심 풍경인 것이다.

비가 와야 그 위엄을 볼 수 있다는 엉또폭포는 맑은 날에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일것이다.


엉또폭포 주차장 쪽에서 폭포길로 가는 표시와, 바로 다음길로 넘어가는 표시가 있었는데 어쩌다 선택한 길이 폭포를 보지 않고 지나는 길이 되버렸다.


보통은 3-4천보 걷다보면 몸이 좀 풀리는데 오늘은 계속 무거웠고 힘이 들었다.


본능적인 느낌이 빨리 가라고 재촉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고근산을 올랐다.


올레길을 걸으면서 여러 오름과, 산을 넘었지만 고근산은 꽤 힘든 편이었다.


나무 계단이 올라가는 내내 정성스럽게 깔려 있었지만 산의 경사와 계단수는 혹독했다.


촘촘히 얽히고 설킨 나무가짓들 사이로 볕이 잘잘이 부서지듯 들어왔다.


그 모습이 레이스 커튼을 통과하고 잠자는 아기의 이마를 간질여주는 평화와 비견할 수 있을것 같다

숲은 고요했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존재를 알리는 새들이 지저귐만이 가득했다.


어느날 꾸었던 낮잠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아주 천천히 흐르는 시간의 늪을 찾아 가고픈 사람이 있었다.

그가 숲을 지나는 동안에는 배도 고프지 않고, 생리현상도 느껴지지 않는다.


촘촘한 그늘과 빛을 오가며 숲안에서 떠돌고 떠돌아다니느라 얼만큼 헤맨건지 알 수 없었다.


숲은 그가 빛을 지날 때 약간의 시간을 흐르게 했고, 그늘안에서는 시간을 멈추게 했다.


그가 빛속에서만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느낄때까지 얼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던건지도 알 수 없었다.


걸어도 걸어도 숲의 길은 알수가 없었다.


그러다, 눈앞에 찬란하게 큰 줄기로 내리쬐고 있는 공터를 발견했다.


그는 가지와 잎을 끌어와 손으로 비벼 냄새를 가득 맡고 기쁜 마음으로 공터로 가 빛을 받으며 장렬하게 늙어갔다.

고근산을 내려왔고, 제남 아동복지센터를 지나 하논분화구로 갔다.

동양최대 마르형 분화구로 분화구에서 용천수가 솟아 제주에서 보기 드물게 논농사를 짓는 곳이라고 한다.

수만년 생물기록이 담긴 생태박물관이라, 하논분화구 방문자센터도 따로 있었는데 닫혀 있었다.



센터가 열려 있었어도, 아마 무심히 지나쳤을것 같다.


길을 걷다보면 내가 몸이 안좋아서 힘든건지, 다른 사람들도 힘듬을 느끼는 곳인지 비교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아스팔트 도로를 많이 걷는 도심형 올레인데 유독 힘들다고 느껴졌다.


되돌아보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경사가 일반도로에서도 반복되고 고근산은 몇번 쉬면서 올라갈 정도로 역시 힘들었다.


여행자센터에 도착해서 맥주를 한잔 마셨고,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한 5분 눈을 붙였다 뗀것 같은데 1시간 30분이 지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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