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긴거리

올레8코스(월평-대평올레)

by 사막물고기

서귀포올레시장에서 구매하고 택배로 부친 카라향을 잘 받았다는 엄마의 카톡을 보았다ㆍ

그래서 맛이 어떻냐고 물으니 맛은 있는데 싱싱하진 않다고 한다ㆍ


그러면 이 카라향은 맛이 있다는 소리인가 없다는 소리인가 헷갈리다가 딸 정성에 아예 맛없다는 소리는 매정할것 같아 돌려 말하는거라 생각했다ㆍ


어버이날 선물로 보낸건데 좋은 과일이 갔으면 참 좋았으련만ㆍ

꽤 많은 상황에서 복불복의 확률을 떠안고 살아간다ㆍ

고칠수 있는 불복이 있는가 하면 적당히 손해를 감수하고 넘어가야 할 때도 있다ㆍ

대부분 어쩔수 없었을거라고 어깨를 으쓱하고 넘어가는 편이다ㆍ

역시 귀찮음은 모든것보다 앞서 있다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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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내가 자동차보다 느리고, 자전거보다 느린 도보로 제주를 여행하는건 아이러니한 일이다ㆍ


걷는 동안에는 귀찮음도 느껴지지 않고 곧바로 짧게 갈 수 있는길도 올레길 정석의 코스로 차근히 걸어간다ㆍ


조금은 신기하고 의아스런 내모습에 멋쩍으면서도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ㆍ


오늘은 19.6km의 긴거리인 올레8코스를 걸었다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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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아왜낭목 쉼터에서 출발하여 약천사를 지난다ㆍ

출발지에 도착하기까지 숙소에서부터 1시간 20분정도 버스를 타는데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배에서 꾸르륵 거리는 신호와 함께 화장실에 당장 가고 싶어졌다ㆍ


어제는 중간에 버스에서 내려 화장실을 갔고 오늘은 연달아 그렇게 할 수 없어 온몸에 힘을 주고 참았다가 출발지 화장실에서 해결을 했다ㆍ


본격적으로 걷기도 전에 힘이 풀리는것 같았다ㆍ

약천사에서 앞으로는 편안한 마음으로 버스를 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ㆍ


가족의 건강, 취업, 연애 등등의 소망보다 당장 발등을 태우고 있는 걱정에 예민해져 있었다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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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수길을 지나 대포포구에 도착했다ㆍ

주차가 잘 되어 있는 선박들이 쉬고 있었다ㆍ

어떤 포구는 제주 바닷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어두운곳도 있고 어떤 포구는 푸른바다위에 예쁜 선박이 전시된듯한 느낌을 주는 포구도 있다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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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 이천원을 내고 주상절리를 구경했다ㆍ

일부러 만들라고 해도 이렇게나 거대한 암벽을 깎을수도 없을 터인데 화산활동이 만들어낸 자연의 산물인점도 불가능에 가깝다고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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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를 내지 않고 올레길을 진행하면 주상절리의 머리카락도 볼 수 없게끔 되어있다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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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릿내오름을 올랐지만 그다지 높지 않은 오름이었고 한바퀴 빙 둘러 오름 출발지로 다시 돌아왔다ㆍ


오름에 올라 내려다보는 풍경은 그저 그랬지만 길게 이어진 데크길을 따라 연잎이 무성히 피어있는 수로를 따라가는 재밌는 길이었다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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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색달해변에 도착해서 이제 중문관광단지 중심에 들어왔구나 함을 느꼈다ㆍ

이전에 와본 기억도 새록새록 났다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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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관광단지를 둘러가는 길은 차도 많고 아스팔트길이 오래 이어진다ㆍ

호텔 옆에 또 호텔이고 그 옆에 또 호텔로 이어지며 호텔 입구 외관 구경을 실컷 했다ㆍ

그 와중에 더 쇼어 호텔은 4월30일자로 영업이 종료되었다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ㆍ


이렇게 부유해보이고 거대자본의 산물인듯 위용을 자랑하는 건물들도 폐점을 한다ㆍ

안정적인 생활, 일자리는 그 누구도 보장할 수 없는 세상이다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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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례생태공원에 와서야 기나긴 아스팔트와 차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ㆍ

예례생태공원은 마음먹고 꼼꼼히 돌아보겠다고 결심하면 하루 종일을 사용할 수 있을것 같은 곳이다ㆍ


돗자리를 깔고 과자를 먹으며 피크닉을 하는 가족이 참 행복해보였다ㆍ

나도 저럴때가 있었는데 하며ㆍ

아이때의 행복한 기억을 답습하는 방법중 하나는 내 아이를 낳아 추억을 나누는 것일지도 모르겠다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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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공원 끝머리 쯤에는 리조트로 지어질것 같았으나 중간에 부도가 나 개방된적 없는채로 세월의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듯한 건물을 보았다ㆍ


4년전에 왔을땐 완공을 앞둔 깔끔한 건물이었다ㆍ

지금은 사연 많은 폐허가 되어버렸다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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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례 논짓물을 지나 하예포구에 도달했고 슬슬 19.8km가 긴거리임이 실감되고 있었다ㆍ

조용하고 평화로운 이 마을을 이전에도 마음에 담았었다ㆍ


언젠가 제주 한 곳에 오래 정착해야 한다면 이곳에 올거라고 다짐했었다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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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평포구에 가까워지면서 멀리 박수기정이 보였다ㆍ

전남친에 대한 원망을 가득담아 올려다봤었다ㆍ

이제는 어떻게 생겼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고 그만한 시간이 흘러 아무 감흥없는 한 사람으로 흘려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ㆍ


시간이 약이다라는 흔해빠진 말은 만고의 진리다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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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잊을날이 오고, 아무것도 아닐 사람이 될 수 있다ㆍ

그때 미리 알았더라면 조금 점잖게 내 자신을 아낄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ㆍ

그런게 아쉬운거다ㆍ

내 마음과, 내 시간과, 내 상심이 애잔할 뿐 그 사람에 대한 지분은 코딱지만큼도 없는것이다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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