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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물고기 Sep 28. 2020

작고 무거운 생명

집으로 오는 길, 살짝 기력이 떨어져 가는 길목에 다다르면 투명한 유리창 안으로 조그만 칸막이에 갇힌 강아지들을 볼 수 있는 애견샵을 만난다.


손 한뼘이 될까 말까한 자그마한 털뭉치들이 폴짝 폴짝 유리벽을 넘어보겠다고 깡총댄다.


누운 곳이 응아와 쉬를 한 곳이고 앉은 곳이 밥을 먹는 자리가 되는 작디 작은 공간에서 사람과 눈을 마주치면 그래도 꼬리를 흔들고 입을 헤벌쭉 벌린다.


축 쳐져 있기라도 하지, 으르렁 대며 성질이라도 부리지, 그런건 배우지도 가져보지도 못한 감정인냥 무구하게 밝고 속 없이 귀엽다.


작은 강아지들보다 조금 더 자란 팔목에서 팔꿈치 정도 되는 강아지는 바닥에 사람 무릎만한 높이의 유리막에 갇혀 있다.


그 아이들은 조금 덜 활발하고 때때로 침울해할 줄 안다.


한뼘만한 강아지도, 팔목만한 강아지도 그저 길을 지나며 눈길 한번 주는것 말곤 해줄 수 있는게 없어 마음이 무겁다.


귀엽고 사랑스럽다며 원초적인 탄성이 튀어나올까 그 길을 지날 땐 조심스러워진다.


생명은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이는게 다가 아닐텐데.


하지만 펫샵에선 어리고, 자그만한 깜찍함이 크나큰 상품성이 되어 수익구조를 만든다.


망해버려라, 사라져버려라. 유리벽이 안식처 전부가 되지 말기를 바란다.


세상에 태어난 강아지 전부가 의식 있는 주인을 만나기 어렵다면 대체 얘네들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


길을 잃고 헤매고 가게가 망했다고 버려지는 것보단, 밥과 잠이 있는 작은 공간이라도 있는게 나은걸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손 한뼘의 강아지가 팔목만한 강아지로 자라는 동안 지금의 공간보다 조금이라도 넓어진 세계를 보여줄 주인을 만나지 못한다면 어디로 가는걸까.


13년을 함께 지내다 2년전에 허망하게 떠나버린 내 털동생을 생각하면 사람 곁에 있어도 마냥 좋았을것 같진 않다.


못해준 것만, 미안한 일들만 아직도 한짐 가득 쌓여 있었다.


그래서 생명을 곁에 둔다는게 얼마나 위안이 되면서도 결국 내 욕심만 차릴때가 많은지 그로 인해 평생을 애틋하고 조심스러워지게 되는지 마음의 돌이 하나 하나 얹어지는 무거움에 사로 잡힌다.


팔목만큼 자란 강아지를 책임질수도, 무지개 저 편에 있는 나의 강아지에게 미안함을 덜어낼 수도 없을 것이다.


유리창 너머의 고 새까만 눈동자들이 빤히 쳐다보면 표현하기 어려운 착찹함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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