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남자가 연인이 아니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건 이별일까 새로운 만남일까.
오래도록 헤어지지 않는 사이에 연인의 정의를 더 두는 나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만남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막연히 짐작은 하지만, 성 소수자의 삶과 그 주변 가족이 감당하는 인내의 크기는 난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겉으론 적의 없이 ' 그래 당신을 이해해, 당신의 선택을 존중해 '라고 이야기하지만, 우리 자신의 삶으로 섞여 들어올 때의 소수자들은 들었던 용기와 위로의 반만큼도 존중받지 못하는 걸 알 수 있다.
늘 타인의 편치 않은 시선의 칼날이 바짝 다가와 찌를 때도 베이게 할 때도 있다.
극단적인 혐오주의자들을 빼고 일반적인 시선은 ' 베이게 하는 쪽 '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나는 아니라고 하지만, 꽃을 들어 환영하는 쪽이 아닌 이상 내 시선도 날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게르다가 남편 에이나르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인간적이고, 인류애적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은 게르다 자신의 예술적인 영감의 원조로서 남편에게 여 피사체가 되어주길 청하면서 시작되었지만, " 그때 게르다가 스타킹과 토슈즈를 신어보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에이나르는
남성성을 유지할 수 있었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원인은 모든 결과의 계기가 된다고 볼 수만은 없다.
태어날 생명들은 태어나는 것처럼 에이나르 안의 여성적인 생명체 ' 릴리 ' 도 눈에 뜨기로 되어있었다.
에이나르라는 남성의 몸에 잠시 불시착한 나비처럼, 자유로운 여성의 몸이 되기 위해 부단한 날갯짓을 한다.
개인적으로는 에이나르보다, 아내 게르다 시점에 감정이 많이 이입이 되었다.
남편에게 '릴리'라는 숙녀의 이름을 지어주고, 예술적 영감을 얻으며 좋아할 때는 언제고, 릴리와 자신을 격일시 시키고 분리하는 에이나르에게 한없이 잔인하게 대하는 모습은 난폭하게 느껴졌다.
남편의 자리로 돌아오길 명했고 떼썼다.
게르다를 아끼고 존중하고 부드럽게 대해주었던 에이나르에게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자신의 성 정체성에 괴로워하는 것은 에이나르 자신도 힘들었지만, 그를 곁에서 바라보는 가장 가까운 가족의 고통과 절규 그 자체가 게르다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으로 느껴졌다.
달라진 모습도 버릴 수 없고, 그대로 품어낼 수도 없는 마음을 게르다는 혹독하게 겪고 있었다.
남편 에이나르, 여자(동성) 친구 릴리를 오가는 그의 역할극 같은 생을 난 어떻게 버텼을지 모르겠다.
인간 에이나르 자체를 받아들이고 영원한 친구가 되기 위한 게르다의 가슴 앓이를 생각하고 나니, 잔인했던 모순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을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는 큰 그림을 보여준 영화였다.
누군가를 가슴으로 받아들인다는 일은 참 쉽지 않다.
금세 사랑을 말하고, 변하지 않겠다는 말을 너무도 쉽게 하는 경솔한 고백들이 이 영화라는 체에 걸러 탈탈 털어내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