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막물고기 Sep 04. 2016

엄마와 함께 대만 2박 3일①

첫째 날 : 용산사 -> 박피료역사가 -> 시먼딩 까르푸, WATSON



지지리 볶고 원수처럼 지낸다는 주변의 다른 모녀 이야기를 간혹 들으면,

엄마와 나는 꽤 사이가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엄마 역시도 잠들 기 전 

내 손을 꼭 잡으면서 " 우리는 참 사이좋은 모녀야 "라는 말을 종종한다.


나이가 점점 들어갈수록 친구들과 시간, 마음을 맞추는 것이 번거롭고 애쓴다는 생각이 들 적이 많아 

엄마와 함께 나들이하는 것을 즐겨하는 편이었고, 그러다 마주치는 엄마 지인분들과도 조금씩 편해지면서

엄마 친구가 곧 내 친구라는 생각에 전처럼 어른을 대하는 것이 많이 어렵지는 않아졌다.


자타가 공인하는 '사이좋은 모녀'의 첫 자유 해외여행을 계획하면서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남들이 부러워할 쿵작 잘 맞는 여행이 되겠거니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다.


한참 깨를 볶고 꿀이 떨어질 시간도 모자를 신혼부부조차도 며칠밤을 함께 지내고 오는 

여행기에서는 토라지는 일이 빈번하다는 사례를 한번쯤 마음에 되새기고 출발했어야 되지 

않았을까.. 하는 뒤늦은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싸웠다 '라고 말하기도 뭣하고, 누군가 한 명이 '마음이 상했다'라고 하기도 뭣한 

개운하게 즐겁지 않은 감정들이 꼭꼭 씹어 먹었다고 생각한 뒤 허를 찌르는 신물처럼

수시로 타고 올라왔다.


출발 전날 여권을 챙겨 오지 않은 것부터, 출국 당일 미리 신청한 마이뱅크 환전소를 출국심사 전에 찾아갔어야 하는데 그대로 게이트를 통과해버려서 대만 달러 유통에 큰 문제가 생긴 것 까지 


나는 최대한 달라진 변수 상황에 맞춰서 계획을 다시 세우고 맞춰 즐기자 라는 생각인 편이나,

엄마는 그 변수들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쪽이었다.


서른 해가 넘도록 '우리 엄마 성향'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있겠냐만은

엄마는 내 생각보다 훨씬 실수에 가혹하고, 온 신경이 고착돼 쉽게 기분이 풀리지 않는 쪽이었다.


나도 그다지 긍정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런 나조차도 그저 넋 놓고 있는 엄마에게 대책방법을 강구하고 이 방향이 훨씬 괜찮은 방향임을 

설득시키면서 '우리는 잘할 수 있다 힘을 내보자 ' 토닥여주면서 

그 당시엔 짜증과 서운함이

돌아와서 곱씹은 상황 회상 후엔 그저 안쓰러움과 연민이 밀려왔다.


엄마의 생에선 위기가 기회로 역전되거나, 막연한 바람이나 긍정적 암시 같은 것들이 

힘이 돼준 적이 없었던 것만 같아서 숙연해졌다.



대만 현지 ATM기기에서 대만달러로 바로 현금 인출이 가능한 방법을 찾아내고 나서야 

엄마와 나는 편하게 잠을 청하며 무사히 대만 타오 위엔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4G 데이터와 통화가 되는 현지 유심칩 대여를 하고, 

대만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이지카드도 구입하고, 

그 이지카드로 공항버스까지 이용할 수 있는지 확인한 뒤에 타이베이 메인 스테이션으로 향하는

1819 버스에 승차하였다.




50여분을 달려 숙소로 예약해둔 LOOK 호텔 근처의 타이베이 메인 스테이션에 도착하였다.

우리나라의 서울역같이 MRT라 부르는 모든 전철과 기차가 승차되는 곳이기 때문에 교통지의 중심이자,

대만 여행의 시작점이 되기도 하는 곳이었다.


한국은 지독했던 더위가 이제 끝나고 막 선선해질 쯤의 가을 초입구에 다다랐는데,

대만에 도착하고 보니 다시 그 불가마에 뛰어든 것처럼 더웠다.


그리고 숨 막히는 더위와 함께 놀란 건 대만 사람들의 오토바이 이용률이었다.

차보다 약 1M 정도는 앞선 곳에서 오토바이 정지선이 따로 있기 때문에 

빨간불에서 초록불로 바뀌는 재출발 신호에는 오토바이 부대가 우르르르 몰려오는 모습이 

낯선 장관이었다.




3시부터 입실할 수 있는 호텔에는 캐리어만 우선 맡겨두고 다시 나와 MRT 2 정거장 거리의 룡산쓰 역으로 향했다.


글을 모르는 문맹의 답답한 마음을 낯선 타국에서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간체자를 전혀 읽을 수 없어,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이 쓰여있는 이 곳이 맞는가 한 획 한 획 비교하는 것도, 

작은 시장가의 상점 메뉴판들도, 사고자 하는 물건의 쓰임 용도도 

전혀 알아보지 못하거나, 한참을 본 뒤에 일부 의미만을 파악하는 나 스스로가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반대로 엄마는 의외로 모르는 것에서는 용감해졌다.

길을 찾아야 할 때도 

나는 좀 더디고 낑낑거려도 알아서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컸었고, 엄마는 

모르면 무조건 사람들한테 손짓으로 물어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현지인들이 알려주는 설명을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할까 봐, 그래서 생기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 같은 체면치레에 얽매여 있었던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때까지 먹여주고 재워주고 공부시켜준 부모의 정성에

이제야 처음, ' 나도 엄마에게 이만큼 해줄 수 있어 '하는 생색과 자랑을 내보려고 하는데

어떻게든 엄마보다는 잘 알아듣고 앞서서 이끌어가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용산사에 도착하니 화려한 지붕 장식이 눈에 띄었다.

타이베이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현지인들과 외부인들이 즐겨 찾는 사원으로

사람들은 북적였다.



지붕뿐 아니라 기둥과 사원 안의 내부 장식들도 화려한 조각과 장식들로 채워져 있었고 경건한 마음과 소원이 있다면 누구든 피울 수 있는 향과 향내음으로  일대의 소박한 거리들과 함께 

대중적이고 온화한 사원처럼 느껴졌다.



대만에서 지붕이 소박하고 매끈한 사원은 ~사라는 이름으로 끝나는 불교를 모시는 공간이고,

지붕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사원은 ~궁이라는 이름으로 끝나면서 도교를 모시는 공간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용산사는 사로 끝나는 사원인데 지붕장식이 화려한 이유는 

불교와 도교 민간신앙이 함께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인가, 사람들은 모시는 신에게 올리는 제사 음식도 소박하고 일상적인 식재료가 많았다.

맛 좋은 과일에서부터, 과자 음료수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신과 함께 나누며 살아가고 있었다.



롱샨쓰 MRT 출구로 나오면 바로 보이는 곳,

주변 시장과 주거지 속에 위치한 곳,

쉽게 닿을 수 있는 거리만큼 대만 사람들에게 신과 신앙은 생활 그 자체인 것 같았다.



9년 전쯤에 엄마와 중국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는 가이드와 함께 3박 4일을 빡빡한 일정으로 '여행'보단 '관광'이라는 단어와 가깝게 다녀왔었는데,

둘 다 향이 들어간 음식에 적응하지 못해서 빵이나, 향이 없는 만토우 같은 것으로 끼니를 때웠었다.


엄마도 나도 둘 다 빵을 좋아하니까 배고픈 채로 다니진 않았었지만 이번 여행에 와서 대만 음식도 잘 드실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왜 하지 않았을까..


대만은 식도락 여행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먹고 쇼핑하는 즐거움이 큰 나라인데, 너무도 당연하게 엄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엄마 입맛에 맞는 현지 음식은 하나도 없었고, 나는 의외로 

향이 나는 음식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리앙시하오에서 시킨 위껑과 라이스누들도 입에 대지도 못한 채 인상을 쓰고 있었고, 

너는 먹어라라고 해도, 함께 먹지 않는 이상 나도 식도락의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다.


이래서는 야시장 구경 의미도 크게 생길 것 같지 않아 먹으면서 일정을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점심을 먹고 걸어서 10분도 안 되는 거리의 박피료역사가(뽀피랴오리스지에)로 향했다.


삼나무를 가공하는 곳이라고 해서 뽀피랴오라는 이름의 이곳은

일제 당시 학교 부지의 일부로 구획됐으나 

전체 부지 면적이 크고 학교로 사용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 상점이나, 기획전시 같은 것들이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1988년에 보수를 시작해 2009년에 완성되었고 150m의 거리에 타이완 전통 양식과 바로크 양식이 

결합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길벗 타이완 북부 책 참조)



바닥의 타일은 정갈하고 깨끗했고, 방안에 방,

건물 안의 건물이 겹겹이 포개어진 방식의 건축이 

숨바꼭질 놀이의 최적의 장소처럼 느껴졌다.




몇십여 명의 아이들이 깔깔 웃으며 숨고 뛰고 돌아다녀도 

모두를 품어줄 수 있을 만큼의 많은 방과 숨겨진 공간들이 많았다.



학교로 사용되었던 부지라고 생각하니, 

하얀 셔츠와 치마를 펄럭거리며 깔깔대는 여중, 여고생 같은 정경들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엄마는 이곳에서 엄마 모습이 들어간 많은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을 찍어주는 것이 엄마 기분을 맞춰주는 걸 아는 나는 

전용 사진사가 되어주었다.



여행지에서 사진 찍기는 엄마와 나는 항상 다른 노선이었다.

내가 찍힌 사진이 남는 것이다 라는 게 엄마 쪽이라면 

내가 본 풍경이 사진으로 남는 것이다 라는 게 내쪽이었다.


이제는 엄마도 같이 찍자고 사정사정하지 않게 되었고, 

나도 어느 지점에서 엄마 사진을 찍어주면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동안의 부딪침, 싸움, 언쟁 같은 힘들었던 시간 뒤에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본능적 평화가 자라고 있었나 보다.



롱샨쓰 역에서 타이베이 역으로 돌아가기 전 한정거장 전인 시먼역에 내려서 

까르푸에 들렸다.

한국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이 찾는다는 시먼딩 까르푸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줄 간단한 선물을 사고, 

엄마의 저녁거리 빵을 사고 


남들에게 줄 선물을 샀으니 우리에게 줄 선물도 사보자며

왓슨스 매장에 들려 화장품을 몇 가지 샀다.


대만 건물들은 대체로 회색 벽에, 칠이 벗겨져 잿빛 필터를 한 겹 입혀둔 느낌이 나는데,

그런 허름한 외관과는 다르게 

건물 내부는 곳곳이 시원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GDP 지수는 한국이 앞서지만 외환보유액이나 소비지표량을 포함한 다른 순위에서는 대만이 높다는 

버스투어 가이드 말을 떠올려 보면,

나라마다 돈을 쓰는 방식이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조대왕 능행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