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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과 Aug 23. 2018

무제(5)

이름도 없는 너에게

사실 두려웠다. 

 
나에겐 아들 한 명이지만 3번 임신을 했었다.
신혼 때 자궁외 임신으로 왼쪽 나팔관을 잃었다. 계속 배가 아팠지만 자궁외 임신인지 꿈에도 몰랐다. 내과만 들락날락거렸다. 그러다 나팔관에서 착상해서 자라던 아기 때문에 나팔관이 파열돼 배 안에 피가 많이 고여 응급으로 개복 수술을 했다.
두 번째 임신 때는 30주에 임신중독이 와서 입원을 했었다. 그때 낳은 아이가 지금 아들이다. 
 
아들은 장애가 있었고 남편은 동생이라도 있어야 의지하며 살지 않겠냐... 나도 정상아를 키워보고 싶다며 나를 졸랐다.
 
그래서 세 번째 임신을 하였다.
 
하지만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내 몸뚱이는 임신이랑은 맞지 않다는 것을.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생명을 내 맘대로 결정하는 건가? 주시면 받는 거고 가지려고 해도 안 주시면 못 낳는 거다. 겸허한 마음과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남편 소원 못 들어주겠냐는 심정으로 임신 준비를 하고 아이를 가졌다.
 
나의 예측이 틀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임신중독이 또 오면 어쩌나 걱정은 했지만 조기진통에 자궁을 묶는 수술은 상상도 못 하였다. 내 몸뚱어리가 원망스러웠다.
 
처음 피가 비치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이미 결론은 내렸는지도 모른다. 신생아 중환자실과 병원 소아병동에서 수많은 아픈 아이들을 봤었다. 재활치료에서 장애아이들 수없이 봤다.
 
조기진통으로 조산을 하게 되면 장애아가 될 확률이 매우 높다. 누가 아는 게 힘이라고 했나? 모르는 게 약이었는데 제 주수보다 빨리 태어나 하지마비 뇌성마비가 되거나 조산아에 많이 나타나는 망막증으로 시력을 잃거나 다행히 건강히 크는 줄 알았는데 지적장애였다는 경우를 많이 봤다. 그렇지 않더라도 태어나자마자 또 중환자실에 들어가 최소 한 달에서 반년까지 있는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
 
장애아 한 명은 그래. 키우자. 그런데 이 길이 얼마나 힘들고 가슴 아픈지 알기에 두 명은 못 키울 거 같았다 
 
18주에 조기진통이 왔다. 40주까지 버틸 확률이 희박했다. 
 
하혈이 멈추지 않았다. 자궁 수축으로 태반이 자극을 받아 피가 나는 거라고 했다. 자궁 수축이 조금씩 느껴졌다. 모든 것이 비정상이었다. 언제든 이상이 있으면 분만장으로(산모 중환자실) 바로 오라고 했는데 가지 않았다.
 
무서웠다.
뱃속에 있는 생명을 엄마라는 사람이 포기하려는 내가 무서웠다.
 
두려웠다.
또 한 명의 아픈 아이를 키우게 될까 봐. 임신해서 아이도 제대로 키워내지 못하는 내 몸뚱이를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것만 같았다. 
 
나의 마음속엔 두 가지 마음이 있었다. 소중한 생명을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야 한다. 혹여 아프고 장애가 생기더라도 감수하고 키워야 한다. 아니. 더 이상 장애아를 키울 수 없다. 아픈 애 치료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더 이상 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다. 실체 없는 두려움을 끝내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서 22주를 넘겨 23주로 향하던 5월 24일 밤이었다. 배가 많이 아팠다. 아들을 낳을 때 겪었던 진통과 비슷했다. 하혈이 심해져서 패드를 다 적시고 입고 있던 옷과 이불에 까지 흘렀다.
 
막연히 생각했던 그 순간이 온 것이다. 갑자기 왈칵 눈물이 났다. 아이에게 미안했다. 모진 생각을 했던 나를 아이는 뱃속에서 다 알고 있었을 테지.
 
내가 이제껏 무슨 생각을 했었나 정신이 퍼뜩 든다. 인간은 참 어리석다. 꼭 마지막에 되어서야 깨닫고 후회하니까.
 
아침이 되었다.
병원으로 갔다. 
초음파를 보던 레지던트의 표정이 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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