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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한 마음

후라이의 꿈 - 악동뮤지션

by 이오십

며칠 전부터 국어공부를 시작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만 시를 즐겨 읽지는 않았다. 그래서 책의 가장 앞 단원이 '시'로 시작하는 것을 보고 조금 실망하며 첫 장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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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상냥하게 시를 감상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시적화자가 어떤 상황에서 무엇에 대해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파악하면 된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건 가벼운 마음으로 읽는 것이랬다.


그중 예시로 나온 시가 나를 울렸다.

손바닥만 한 짧은 글이 말 그대로 다 큰 사람을 별안간 엉엉 울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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쬐그만 것이

노랗게 노랗게

전력을 다해 샛노랗게 피어있다.


아무 곳도 넘보지 않는다.

다만 혼자

주어진 한계 그 안에서 아슬아슬

한치의 틈도 없이 끝까지


바위새를 비집거나 잡초를 속이거나

씨 뿌려진 그 자리가 바로 내 자리

터를 잡고


물을 길어 올리는 실뿌리

어둠을 힘껏 밀어내는 떡잎

그리고 그것들이 한데 어울려

열심히 열심히 한 닷새


세상에 그 밖에는 할 일이 없어서

아주 노랗게 노랗게만 피는 꽃

피어선 질 수밖에 없는 꽃.


쬐그만 것이지만 그 크기는

어떤 자로서도 잴 수 없다.

아 민들레!

그래봤자

혼자 가는 자의 헛된 꿈.

하지만 헛되어도 좋은 꿈 아니냐.

한 닷새를 짐짓 영원인 양하고

보라. 저기 민들레는 피어있다.


- 이형기, <민들레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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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강의를 보면서 우는 나 자신의 모습이 정말 어이없었다.

하지만 정말 후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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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한하게도 어떤 위로는 말보다 글이 더 깊이 다가온다.

말은 머릿속으로 그게 진심인지 아닐지를 판별하게 한다. 물론 글도 사람이 쓴 것이지만. 그래서 희한하다.


나에게 쓰지 않은 글일수록 더 편안하게 느껴진다. 내 맘대로 가져다가 내가 필요한 곳에 둘 수 있어서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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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현(여름 역)과 임시완(대범 역)이 주연인 2022년도 드라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를 지난해 여름에 추천받아서 지난해 겨울에 느지막이 봤다. 제목 그대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봤다.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던 시절에는 정작 그 드라마를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드라마의 내용조차 상투적으로 느껴버릴까 봐. 왜곡하고 싶지 않았다.


드라마는 재미있었다. 처음엔 여름의 답답한 성격 - 상사에게 싫은 소리 하길 망설이고 대부분의 물음에 흐릿하게 대답하는. - 에 뒷목 잡았지만. 나는 불확실하고 모호한 것을 즐기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애매한 내 상황에 스스로 답답해하는 것이었다.

확실한 것. 확실한 것을 왜 그리 좋아하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본능적으로 안정된 상황을 바라서 그러는 것일까. 누구나 확실한 것을 좋아할까?


기억에 남는 장면은 7화였나, 8화였나 그 쯤에 대부분의 주조연 등장인물이 돼지고기 집에 모여서 회식하는 장면의 대화였다. 안곡 도서관 군청 공무원인 조지영이 외관적으로는 삐딱선을 타고 있는 것 같은 고등학생 김봄에게 아직 어리니까 목표를 가지고 살라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김봄은 도서관에서 종이에 그림을 끄적이는 아이인데 그러지만 말고 예술고등학교를 가던지, 미술학원을 가던지(오래돼서 정확하지 않다) 뭐 그런 현실적인 대안을 세우고 살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김봄은 화가 나서 나갔고 조지영의 말도, 김봄의 반응도 이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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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쾌해지려고 본 드라마인데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내 인생이 현실이고 드라마는 가상이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엔 해소가 되지만 드라마가 끝나면 내 인생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또 다른 드라마를 봤다.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라는 2016년에 나온 일본 드라마다. 출판사에서 오타나 잘못된 표현을 교정하는 코노 에츠코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다소 교훈적인 면이 두드러지는 내용도 있었는데 유치하다기보다 순수하게 느껴졌다. 예를 들면 문장 하나로 표현하면 작위적일 수 있는 '세상의 모든 직업들은 귀천을 떠나서 존중받아 마땅해.'를 에피소드 속 주인공이나 조연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는 경우다.


고등학생 때부터 패션잡지를 보며 패션잡지 편집자를 꿈꾸던 코노 에츠코가 편집부가 아닌 교열부에 가는 설정부터 마음에 들었다. 세상에 마음에 안 되는 게 얼마나 많은데 7년째 공개채용에 응시했다는 캐릭터 설정이 비현실적인 듯 현실적으로 느껴져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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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 돼?

안 되는 건 있는데 꼭 안 되는 것도 아니더라, 하는 걸 느끼게 하는 드라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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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대 내내 '왜 안 돼', '나만 안 돼', '왜 안 되는 거지.' 이런 생각들로 우울해했다.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위로가 '안 되는 것도 있는데, 될 수도 있어.'다.


염세주의나 허무주의, 운명론에 빠져서 '그래서 나는 안 되는구나.'라는 실패에 대한 자기 합리화 내지는 흡수, 그리고 '어차피 해봤자 되는 만큼만 될 텐데, 그냥 마음이라도 가는 대로 다 놓아버리고 살래.'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을 그냥 체화하고 있었다.


정말 싫어하는 나의 모습이다. 나는 '초연함'과 '포기'를 잘 구분할 줄 몰랐다. 지금도 잘은 모르지만 다르다는 걸 안다. 초연함의 일부가 포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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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망하게도 나는 그렇게 많은 시도와 도전을 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하나' 안 된 것을 정말 크게 보고 과민하게 여겼다.

의미가 큰 하나라고 생각해서 그럴 수 있었지만, 그럴 것도 아니었다.

패배주의에 빠져들면 하루에 일어나는 것조차 허덕이게 된다.

눈 뜨는 것도 정말 버겁다. 눈을 뜰까 말까, 아침에 해 뜨는 것도 싫었다.

겨우 책 한 장만 넘기기도 했다.

겨우, 겨우, 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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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허무하다.

라고 하면서 매일 울던 날도 있었다.

꿈에서 깬 세상이 끔찍하게만 느껴진다면 그게 얼마나 지옥일까.

삶에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게 어떤 결론으로 귀결될 수 있는지는 태도가 중요했다.

비관적인 날엔 '아, 그냥 탈출하고 싶다.'

긍정적인 날엔 '의미는 살면서 만드는 거랬어.'


*


대부분의 인간은 불안하지 않나.

대부분의 동기가 불안이지 않을까.


허무해서 뭐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에 집착하고 소유하고 그러는 것 같다.

그 목적물이 사람이던, 물건이던, 어떤 생각이던, 마음이던.


허무한 마음을 본인이 긍정적으로 달래주는 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태도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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