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mor Tumor - Sunset Rollercoaster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내에는 공용시설건물이 있다. 한 층의 면적은 대강 80㎡ 정도,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건물이다. 지하 1층에는 운동시설이 갖춰진 헬스장, 지상 1층에는 어린이집과 경로당, 2층에는 관리실과 강습이 이루어지는 프로그램실, 3층에는 독서실과 야외 옥상이 있다. 나는 공용시설물을 잘 이용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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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궂은 날에는 공용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오후에는 아파트 내부 독서실에서 책을 읽거나 헤드셋으로 음악을 듣는다. 독서실에는 6인용 책상이 6개 놓여있는데, 공간이 널찍하고 빛이 잘 들어오는 편이다. 여름이 되면 독서실을 자주 찾게 된다. 집에서 혼자 에어컨을 틀고 있으면 에너지 낭비 같아서 선풍기를 쐬며 땀 흘리는데, 독서실에 가면 적어도 둘 이상의 사람이 있기 때문에 덜 아까운 느낌이다.
나는 나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은 꿈이 늘 있었다. 작은 방에서, 작은 작업실로, 작은 집으로. 예능 ‘나 혼자 산다’를 보는 이유 중 하나가 내 꿈을 투사해서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는 방송이기 때문이었다. 화면이 꺼지고 나면 금세 허무하다. 내 손으로 일궈낸 내 꿈은 아직 내게 오지 않아서 그렇다. 요사이에 심리적인 변화가 생긴 것 같다. 누릴 수 있는 건 누리면서 살고 싶고, 가지고 있으면 노력해서 손에 쥐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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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심한 인간 하나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야망 없는 사람, 거창하지 못한 사람. 다르게 말하면 담백하고, 소박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꿈이 있으면 힘들고, 꿈이 없으면 슬프다던데 나는 슬픈 인간 쪽에 가까웠다.
야망 없는 사람들에 대해 비하하려는 목적은 아니다. 다만 야망 없이 사는 ‘나’를 관찰한 결과, 무기력하고 힘이 쭉 빠져있는 사람이었다. 벌써 늙어버린 것 같았다. 뭘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속으로만 꾹 눌러 담고 내 것이 아니려니, 하고 지나갔다. 생각해 보면 에너지가 정말 적게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 와서 알 수 있는 건 에너지는 만드는 쪽에 가까운 것이라는 것이다. 에너지가 없다고 계속 쓰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면 0에 수렴하게 바닥나는 것이다. 힘은 쓸수록 불어났다. 남아나는 힘은 비축가능한 체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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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보다 더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사람이었을 때 나는 사람들이 다 착각하고 살고 있다고 속으로 비꽜다. ‘인생이 자기 마음대로 되고 있다’는 착각 말이다. 강물에 빠져 헤엄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차피 우린 다 강물 바닥에 백골로 가라앉아 버릴 거야.’라고 비관하는 꼴이다. 생각해 보면 인생의 디테일 따위는 다 무시해 버린 판단이다.
나는 강물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겠어,라는 쪽이라고 생각했다. 속으로 헤엄치는 사람들을 대단하게 생각하면서도 약간의 우월감 - 내가 엄청난 걸 알고 있다는 생각, 하지만 어리석은…- 을 느꼈다. 자신이 가고자 한 방향으로, 원하는 섬에 다다른 사람들을 보면 질투했다. ‘운이 좋았고, 당신은 인생이 자신 마음대로 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어디 한번 인생 끝자락에 당신의 믿음에 강한 배신이라도 맛봤으면 좋겠네.’라는 음침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물에 가라앉고 있었지만 말이다. 분명 나는 몸이 뜨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강물이 날 어디론가 데려다주긴 하겠지, 마음 놓고 있었는데 너무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당시엔 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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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기보다 슬프기를 선택했을 때 그다지 바로 내 인생에서 찾아온 변화는 없었다. 나는 이 점에서 차라리 ‘힘들기’를 선택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적당히 힘들기 말이다. 인생에서 찾아오는 변화가 없다는 건 내가 더 다양한 것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폭이 좁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두려워졌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나는 한 해, 한 해 나이 들어갈 텐데, 겉모습을 따라잡지 못한 나의 내면을 바라본다면, 끔찍하다. 하나라도 나아진 게 있는 사람이 더 나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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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엄치는 사람들에 대해서 ‘운’이라고 비꼬았지만 나 역시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 - 환경적인 부분, 이를테면 아파트 공용시설 - 이 ‘운’으로 얻어진 것일 뿐이라고 느낀다. 운을 바라면서 어디론가 헤엄치려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바라는 곳에 도달하든, 전혀 다른 곳에 도달하게 되든 간에 물 위에 둥둥 떠서 힘 있게 헤엄치고 싶다. 이게 요즘 내 생각의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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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보는 애니메이션은 ’ 은혼‘이다. 131화까지 봤는데 재미있다. 각자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는 게 인생이다…라는 내용의 애니메이션이다. 아마 별일 없으면 끝까지 다 보고 싶다. 은혼을 보다 보니까 배경인 에도 시대의 사회상을 알고 싶어 져서 ‘국화와 칼’이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루스 베네딕트라는 미국의 문화인류학자가 쓴 1960년대 무렵 일본 문화에 대한 리포트 형식의 글이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흥미로운데, 일본과 전쟁 중이던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 파악해 달라는 요구를 해서 쓰게 된 글이다. 미국인이 쓴 일본인에 관한 글을 읽는 한국인.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 중 하나인데 이 시리즈를 다 읽어보고 싶어졌다.
추가적으로 은혼을 e book 형태의 만화로 읽어보고 싶다. 언젠가 크게 이벤트성으로 세일하는 날이 오면 소장판으로 사들일까 싶다.
왜 이 정도로 은혼을 좋아하는지 생각해 보면
한심해 보이는 답 없는 인생(술, 담배, 도박, 변태..) 반백수 아저씨..(아저씨 나이는 아닌데 행동거지가 아저씨스럽다.)가 주인공이다. 더 이상 사무라이가 힘을 쓰지도 못하고, 구시대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천인(외계인)들이 막부를 점령하고 이런저런 문호개방으로 인해 혼란이 가중된 시대상황이 배경이다. 그 과정에서 딱히 하는 일 없어 보이는 반백수로, 해결사(심부름센터…? 무력을 활용한.) 사무소를 운영한다. 허리춤에는 동야호라는 목도를 차고 검은 트레이닝 세트를 안에 입고 밖엔 흰색 유카타를 입고 다닌다.
에피소드가 하나씩 진행될수록 새로운 인연들이 생긴다. 별거 없어 보이는데 그런 별거 없는 것을 지키려고 사는, 소년만화스럽지 않은 적당한 온도가 취향에 맞았다. 각 캐릭터마다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들 하나씩 발견할 수 있는데, 그런 것들을 지켜보면서 누가 누구와 협력하고 갈등하는지 보는 것도 참 재미있다.
단순히 말하면 재미있어서 본다. 참고로 1,2화는 재미없으니 3화부터 차근차근 보시면 좋겠다. 20화부터는 확실히 재미가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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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혼을 보다가 불현듯이 취업단념청년 지원센터의 모집 글을 보고 쇠뿔을 단김에 빼듯이 통화, 미팅을 가졌다. 물론 나는 스스로를 취업단념청년이라고 생각하고 살진 않지만, 완전히 취업단념청년의 조건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여전히 회사에 취업하고 싶은 생각은 일절 없다. 하지만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건 동의한다. 이 두 문장이 가능성의 많은 부분을 배제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취업단념청년 지원센터에서 시간을 보내보고 어떻게 생각이 바뀌게 될지 기록해 볼 생각이다. 물론 아직 그 모집에 뽑혔는지도 미지수다. 대견하다고 느껴주길 바라서 이 정도로 솔직해진 것은 아니고, 생각의 변화가 있고 그로 인한 행동을 보였다는 것을 기록하고 싶어서 쓰게 되었다.
이제까지는 생각만 주야장천 했으니까. 솔직히 지금도 어느 한쪽에서는 생각만 하고 살고 싶다는 관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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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집글을 보고 간단히 통화를 한 후, 제출 서류와 간단한 설문조사 - 지원 자격에 관한 - 를 거친 뒤 바로 다음 날 미팅을 가졌다.
미팅하러 가는 버스 안에서 내가 느낀 감정을 메모했다.
뭔가 치욕스러움,
수치스러움.
도움받는 게? 나를 어떻게 볼지? 걱정돼.
도움 받는 것일 뿐이다. 정보가 너무 없어서.
이제까지? 조금 쉬고, 놀고 지냈음. 자격증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책 읽고 그렇게 지냈지 뭐.
내가 부진해서?
하기가 싫어?
그리고 약간의 기대와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 집을 나섰다.
어쨌거나 그들이 하는 것도 사업임. 청년 취업시키는 사업. 아닌 것 같음 나오자.
내가 기대하는 거? 작게라도 수익 만들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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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 놓고 보니 이유를 찾았다. 무직, 백수, 일 안 함 청년들 사이에 있는 나를 인정하기 싫었다. 왜냐하면 난 일 안 하는 것을 한심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일이 없으면 경제권도 없고 독립도 없고 자유도 없는 것이다. 자유라는 건 내가 세운 규칙 안에서 행동할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한다. 이제까지 나는 내가 바라는 내 일로 벌어먹길 바라면서 취업을 미루고, 미루고 미뤘는데, 그리고 회사에 들어가서 일하고 사회생활 하는 것을 꺼리는 내 모습에 변화가 있길 바란다. 더 이상 내면의 갈등은 지친다. 뭐라도 행동하고 갈등해 보는 게 좋겠다, 싶다.
은혼 에피소드 중에 M.H.N(마다오 = 마루데 다메나 오지상), 번역하면 완폐아(완전 폐품 아저씨)..라는 별명을 가진 하세가와 다이조라는 캐릭터가 초밥가게 대타 아르바이트 하는 에피소드를 보고 위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되었다. 무슨 생각이 발현된 건지 지금은 기억이 안 나는데, 하여간 이 에피소드를 보고 움직였다. 아마 마다오가 된 나의 미래를 떠올리고 어떤 감정적 변화가 있지 않았나.. 싶다.
한심해서 싫다 = 한심하다 + 싫다
인데 싫다는 건 좀 숨겨보도록 하겠다.
그저 한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