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오십 Nov 11. 2023

내 안의 보더콜리 기르기.

Older - Alec Benjamin

고향, 집, 향수, 그리움, 돌아가고 싶은 감정이 들 때 생각나는 음악이 있다. 살다가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지 의심이 들 때, 지금의 삶에 지쳐서 냉장고가 텅 빈 자취방에 널브러져 있자니 따뜻한 밥냄새가 나는 유년시절로 돌아가고 싶을 때, 특히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막막하지만 내일 제시간에 일어나기 위해 잠들어야 하는 쉽지 않은 상황일 때.


잠시 숨을 고른다. 계속 달리고 달려서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시험받는 것 같았다. 옛날 우화 중에 한 영주가 농부에게 "아침 해가 떠서 해가 질 때까지 당신이 달려가는 곳까지 당신에게 땅을 선물하겠소."라고 말했다. 농부는 아침 해가 뜰 때 자신의 집에서 나와 전속력으로 달렸다. 아침도 거르고, 얼굴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들판을 가로질렀고, 해가 중천에 떠서 마을 사람들이 점심식사를 하고 있을 때도 열심히 지평선 끝으로 달렸다. 달리고, 또 달리다가 결국 농부는 지쳐서 쓰러졌고, 일어나지 못했다. 영주는 약속대로 땅을 선물했지만 받을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태어나서부터 모두 경쟁한다. 누가 누구보다 더 잘하고, 조금 더 섬세하고, 조금 더 강인하고, 조금 더 잘 알고, 똑똑한지에 대해서 평가하는 방법도 무수하다. 초등학생 때는 옆에 서 있는 친구보다 빠르게 달리려고 노력했고 중학생 때는 옆에 앉은 친구보다 높은 점수를 받고 싶어 했다. 비교와 평가 앞에서 민감한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나는 타인에게서 받는 인정이 중요했던 아이였기 때문에 내가 무얼 얼마나 잘할 수 있는지는 관심을 가지기보다 모든 걸 다 잘하고 싶어 했다. 최대한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고, 한 마디로 모범생이었다. 모두 스스로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유독 나는 스스로에 대해 잘 몰랐다. 뭘 얼마나 잘하고 싶은 건지, 뭘 할 때 재미가 없는지 그런 게 없고 그냥 뭐든 다 재미있고 다 잘할 수 있다고 믿는 낙천적인 인간이자 부정이란 게 없었다.


고등학생 때 특목고를 지원했는데 보기 좋게 떨어졌다. 그 이후로 많은 게 바뀌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과학자가 꿈이었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어린이과학동아를 정기 구독해서 정말 재미있게 읽었는데 특히 좋아했던 꼭지는 많은 과학자들의 인생사였다. 실패하고, 좌절했지만 결국 극복하고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무언가를 찾아내고 발견하고 깨달아낸다는 위인전 플롯은 같은 맛이지만 읽을 때마다 똑같은 자극을 줘서 더 맛있었다. 치킨이 영원히 질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좋아하는 과학자 취향도 있었는데 우선 금수저에 원래부터 잘 살았고, 인기도 많고, 그러니까 인생에 위기가 없던 인물을 좋아했다. 근데 다시 생각해 보면 위기가 없던 인물은 없었다. 크던 작던 위기는 있었고 그 위기가 조명되었는지 아닌지의 차이인 것 같다. 아무튼 과학잡지를 읽고 있노라면 나도 언젠가는 세상에 기여를 하고, 잡지 속 인물이 되어 인터뷰하고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그래서 내 어릴 적 꿈은 과학자였다.


부모님의 자식교육에 대한 열망은 시대상으로 보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신문기사에서 자주 보이는 헤드라인이 "자식세대 교육에 노후를 포기하는 사람들" 이런 것들이었으니  교육에 투자를 많이 받은 것을 넘어서서 과열된 세대다. 우리 부모님은 특히 나에 대해서 자부심이 있으셨다. 일곱 살 때 IQ검사를 했는데 꽤 높은 숫자가 나와서 유치원에서 따로 전화가 왔었다던지, 추석 때 친척집에 모이면 나를 두고 우리 애는 차 안에서도 만날 책만 읽는다고 자랑한다던지. 뭐 그런 이야기들. 그 외에도 부모님 영업장 앞을 지나가던 할머니가 사주를 봐주셨는데 애가 영리한데 끝까지 하려는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좀 잘 붙잡아줘야 한다던지 하는 민간신앙까지…,

 요약하자면 애가 똑똑하니 공부를 시키세요. 이런 내용이었다. 반복적으로 나에 대한 정의를 타인의 입에서 듣다 보니 나는 자연스레 공부를 잘하는 사람, 수학과 과학을 잘하고 좋아하는 아이로 정의 내리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그게 맞는지, 틀린 지 의심할 겨를 없이 좋아하는지, 더 좋아하는 게 있는지 탐색할 생각도 없이 내 세계는 과학으로 채워졌다. 내가 인식한 세상은 미술과 음악보다 과학이 더 인정받는 세상이었다. 나중에 부모님께 돈을 벌어서 효도를 하고 싶다면 미술보다 과학이 더 선명했다. 10살 어린이였는데 아무래도 과학자 전기를 많이 읽어서 그런 꿈을 꿨던 것 같다. 주변에서 설레발친 것도 맞지만 그만큼 그 당시에 내가 과학에 관심이 많은 어린이였던 건 사실이다.



중학교 첫 수학시험에서 나는 50점을 받았다. 나는 공부를 잘하는 애인데 자존심이 상했다. 진학한 중학교에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이 없어서 덜 부끄러웠지만, 이런 점수를 받는 게 충격이었고, 두 번째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점을 받는 애들이 있다는 사실이 또 다른 충격이었다. 대체 걔네는 어떻게 공부를 하길래, 그땐 내가 당연히 옳은 방법으로 공부하면 100점을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비록 첫 시험은 50점이었지만. 그 이후로 부모님의 권유로 수학학원과 과학학원을 다녔다. 초등학교와 다른 수학의 난이도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학원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주위 어른들의 추천에 의해 학원을 열심히, 그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으며 성실하게 다녔다. 숙제도 하고,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어제 한 숙제 이야기하고, 장난치고, 어제 본 영국드라마 셜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집에 가서는 셜록홈스 소설을 읽고.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 이후로는 점점 성적이 올랐고, 시험문제를 잘 풀기 위해서는 문제집에 있는 기출문제를 풀어서 실수를 줄여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서 실수를 줄이기 위해 연습하는 건 지루했다.

 

당시에 내가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던 건 주변의 친구들이었다.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 중에 아이돌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비스트, 블락비, 인피니트. 그때만 해도 하나도 몰랐는데 그 애 덕분에 세상을 살면서 즐길 거리를 많이 알게 되었다. 그땐 왜 좋아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데, 내가 모르는 세계를 이미 알고 즐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친구는 매우 성숙하게 느껴졌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먼저 접하고 확장한 사람은 뭔가 달라 보인다. 그때 수학, 과학 말고도 세상에는 더 많은 세계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내 주변에는 이미 많은 것들이 있었는데 내가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읽던 추리소설도, 국어시간에 읽던 시도, 일요일 밤이면 챙겨보던 개그콘서트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사연과 음악도 모두 내 주변에 있었다.



수학학원을 계속 다니는데 나는 점점 진도에 뒤처지기 시작했다. 숙제를 해가야 하는데 숙제를 하지 못했다. 과학잡지를 읽던 어린 시절처럼 그렇게 즐겁지는 않았다. 수열에 대해서 고민하고, 면접을 담당하는 선생님들 앞에서 처음 보는, 하지만 공부해 온 수학문제를 앞에서 풀고, 인상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어떤 말을 할지 고민하는 내 모습에 묘한 반항심이 들었다.

 분명히 내 꿈은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는데, 과학자가 되려면 과학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카이스트에 가야 하는데, 딱 거기까지가 내 꿈의 형태였다. 더 이상의 구체화는 없었다. 더 알고 싶은 것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은지도, 해보고 싶은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수반되는 끝없는 공부를 견뎌낼 각오도 갖춰져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때 과학고등학교 면접을 담당하신 선생님들이 참각막을 가진 선생님들이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내가 과학고등학교에 진학했더라면 나는 그곳에서 어떤 꿈을 발전시켜 나갔을까 종종 궁금하다. 지금은 이렇게 단정한 문장으로 나의 진학실패를 표현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내가 왜 떨어졌는지, 어떤 집단에 받아들여지길 실패했다는 지독한 거부감에 시달렸다.

 외관이 모범생이라 불량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잘 티가 나지 않는 나는 점점 다른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만약, 내 꿈이 사회가 만들어낸 환상이라면? 공부를 잘해야 대접받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가 만들어낸 보기 좋은 미래상이라면 나는 스스로를 속여왔던 것인가?


그렇게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약간은 삐딱해진 상태로, 하지만 여전히 외관은 병들지 않은 모범생의 모습으로. 고등학교 첫 시험은 굉장히 성공적이었다. 첫 모의고사에서 반 1등을 했다. 여전히 나에겐 꿈이 없었다. 과학자라고 하기엔 좌절된 과학고등학교가 생각나서 배가 아프고, 국어를 좋아하지만 국어선생님을 꿈꾸지는 않았다. 미술도 좋아하고 다른 친구들이 내 그림을 좋아해 줬지만 내 그림보다 더 잘 그리는 친구들 앞에서 한 없이 작아졌다. 수학에 대해서는 언제쯤 충분하다는 기분을 느낄지 뒤돌아볼 틈 없이 기계처럼 수학문제를 풀었다. 점점 재미가 없었다. 눈은 교과서를 보고 있지만 생각은 교과서에 묶이지 않았다. 과연 나는 대학에 가는 게 맞는 건지. 가고 싶은 과가 하나도 없는데.

 당시에 신사의 품격이라는 드라마에서 장동건이 건축사 사무실 소장으로 나왔는데 그게 건축학과 진학에 영향을 끼쳤다. 사실 나는 건축이 멋있다, 라기보다 드라마 상에서 장동건이 풍족하게 생활하는 게 부러워서 선택했다. 어쩌다 보니 손재주가 좋은 편이고, 이과 수업을 들었기 때문에 전문 직종인 건축사가 되어야겠다는 가벼운 생각으로 임시적인 꿈을 설계하고 과를 결정하게 된다.

 그렇게 과학 연구직 다음으로 가장 멋있다고 생각하는 건축학과로 5 수시를 썼고, 국립대에 합격을 하게 된다. 점점 떨어진 성적 덕분에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에는 들어가지 못했고, 지방 국립대에 문을 닫고 들어간다. 단순히 공부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 과거의 역사를 생각하면 굉장히 역설적인 결과였고, 당시엔 그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부모님께 차마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말할 용기도 없고, 대학에 가지 않으면 무얼 해야 할지 도통 갈피가 잡히지 않았기에 대학에 얼레벌레 진학하게 된다. 부모님은 이런 내 생각에 대해서는 잘 모르셨다. 아셨다고 해도 울타리 안에서 방황하길 바라신 것 같다.



대학에서는 많은 걸 배웠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아직 뭘 배웠는지 모르겠다. 분명 맞지 않는 전공과 수업이어도 배운 것들이 있겠지만 당시엔 회의감을 가장 많이 느꼈다. 이러려고 대학에 왔나, 이런 생각 말이다. 대학생활은 통 재미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꼭 가고 싶던 학교도 아니었고, 내가 잘하는 게 뭔지도 잘 모르는 혼란 속에서 입학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선 학교에서 만난 동기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않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니 도통 낯선 것들 투성이었다. 조교님과 교수님은 너무나도 먼 존재들이고, 선배는 그것보다 더 먼 존재고, 친해진 동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알코올 분해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시끌벅적 와글바글한 술자리를 즐겁게 보내기란 굉장히 많은 시도가 필요한 일이고, 첫 OT에서 술 마시는 자리는 굉장히 어색하고, 또 재미없었다. 그 시간에 크게 실망한 나는 그 이후로 낯선 사람들이 많은 술자리에 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재수 없게도 옆 학교는 과학으로 유명한 대학교라서 나의 열등감을 크게 자극했다. 그럴수록 나는 방향도 모르는 채 멀리, 멀리 달릴 생각만 가득했다. 그러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현재의 모든 것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내가 바라던 과거의 영광이 있는 미래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1학년 때, 나는 굉장히 열심히 했다. 뭘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면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열심히 했다. 어려우면 밤을 새우면서, 모르면 계속 인터넷에 검색하면서, 재미있는지 없는지 판가름할 새 없이 무지성으로 열심히 했다. 그게 바로 n연차 모범생으로 살아온 내 생활패턴이었다. 재미가 없다고 생각되는 일도 나에게 나중에 약이 될지도 모르고, 또 나의 편견일지도 모르고, 또 내가 잘 못하기 때문에 재미가 없는 것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질리도록 성실했고, 열심히 했다. 결과는 좋았다. 모형을 만들고, 포토샵과 일러스트를 활용해서 아이디어를 담은 패널을 만들고. 모두가 엉성한 1학년이라서 아주 좀 더 노력한 티가 나는 내 작품이 남들보다 조금 더 튀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잘하는 줄 알았다. 재능이 있는 줄 알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을 미뤘고, 해야 한다고 믿는 일을 우선시했다.


2학년 때, 역시 열심히 했다. 21학점을 들으면서, 관심사를 찾기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나중에 돈을 잘 벌 수 있는 일, 취업이 잘 될 것 같은 일, 돈을 좇으며 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내 경제력은 0에 수렴했다. 아르바이트로 돈 벌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몸 따로, 마음 따로 그 자체였다. 용돈을 받으며 안정적인 직업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시기라고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스스로의 무능력함에 자아효능감이 깎이고 있었다. 과외를 구해볼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스스로를 대학진학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정의 내렸기 때문에 타인의 수능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나는 더 이상 공부 잘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학교 생활은 정말 정말 정말 재미가 없었다. 스스로 만들어 낸 고독이자 미뤄둔 숙제들이 봇물 터지듯 폭발하고 있었다. 한 구석에서는 비참함을 느끼고 있었다. 글을 써서 내고 싶어도 글 하나 쓸 의지조차 없는 나는 과연 무엇인가. 드러내고 싶지만 드러내면 모두가 실망할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깊이 침잠했다.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에게 너무 각박했다 싶다. 글 못 쓰면 그게 뭐 어떤가. 글을 못 쓰는 게 의지만의 문제는 아닐 텐데.


3학년 때, 나는 휴학을 했어야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6월 초면 대학에서는 1학기 기말고사 시즌이다. 건축학과에서 그 말은 전시 패널과 전시 모형을 만드는 막바지 시기이고,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완성을 해서 프로젝트를 마무리해야 했다. 소식을 들은 당일날 장례식장에 가고 싶었다. 하던 과제를 두고 가려는데 부모님은 그래도 과제는 하고 오라고 하셨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할 일을 해야지.”

할머니와 나는 그리 친하지 않았다. 애정이 그리 큰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미움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 자체가 에너지라고 치면 내가 할머니에게 쏟는 에너지는 아주 작았다. 그런데도 할머니가 없어진 게 너무 슬펐다. 발인하면서 할머니를 보낼 때 그 과정을 함께하지 못해서 그런 걸까 후련하지가 못했다. 어쩌면 시간은 늘 흘러가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이별과 만남 같은 이벤트가 그 사실을 맞닥뜨리게 해서 더욱 시간이 주는 압박감을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로데오가 떠오른다. 흥분해서 마구 날뛰는 말. 그 위에서 간신히 버티는 사람. 나는 말이기도 했고, 말 위에 올라탄 사람이기도 했다. 로데오에서 성공이 오래 버티는 것이라면, 나는 오래 버티는 게 중요하다는 것도 모르고 이리저리 날뛰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흥분해서 날뛰고 있는 말인지, 내가 로데오 말이라고 상상하는 사람인건지, 아니면 그런 상상을 하고 있는 말인건지… 장자의 나비꿈 우화가 떠오르는 순간이다.


4학년 때, 조별과제의 연속이었다. 두 학기 모두 조별과제가 있었다. 여전히 코로나가 유행했고, 본가와 1시간 반 걸리는 거리를 통학하며 한 학기를 보냈고, 다음 학기엔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때 목표 없이 열심히 사는 것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왜 열심히 해야 하지. 그렇지만 행동은 관성에 의해 기계적으로 성실하게 움직였다. 아침 6시에 일어나 7시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서 조별과제를 하고, 9시나 10시면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집에 가면 11시, 12시. 그렇게 주 6일, 세 달을 살았다. 조별과제의 결과물은 좋았다. 하지만 개인적인 만족감은 떨어지는 학기였다. 투자한 시간과 가치에 비해 결과물은 작아 보였다. 당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게 앞으로의 삶이라면 거부하겠다고, 그런 마음을 가졌다. 워라밸이라는 work, life, balance 단어에 꽂혀서 나의 라이프는 어디에 가버린 것인가, 불평했다. 물론 지금은 또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유퀴즈온더블록에 방시혁 님이 나온 걸 봤다. 그 분은 워라밸이라고 얘기하면 마치 노동이 삶의 적같이 느껴지는 게 너무 싫어서 워크 라이프 하모니라는 말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워라밸에 메여있던 시선이 좀 자유로워졌다. 당시의 나는 노동이 삶의 적이었다. 돈 많은 백수, 무위도식, 안빈낙도가 너무 부러워서 안달났다. 그렇지만 나도 이 꿈의 명백한 흠을 알고 있었다. 금방 이뤄질 리도 없고, 그렇게 산다고 내가 느끼는 허무한 감정을 채울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몸은 편하겠지… 싶지만. 아무튼 성숙해지는 과정이었고,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이유를 찾고 스스로를 원망했다. 지금은 뭐 그럴 것까지야, 싶지만.

4학년 내내 조별과제를 진행하면서 한 생각은, ‘내가 이 팀에 민폐가 되기 싫다.’였다. 이렇다 보니 만족의 기준이 타인에 달려있어서 굉장히 피로한 기간이었다. 스스로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걸 그때 알게 되었다. 앞서 말한 워라밸이 ‘노동은 고된 것이고 현재의 노동 강도는 너무한 것이다’라는 시선을 담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나도 모르게 워라밸을 생각함과 동시에 노동은 덜 하는 방향으로 진로를 선택해야 한다는 기준을 만들었다. 이와 같이, 민폐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이미 나는 팀에게 민폐가 될 가능성이 있다‘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린 모두 살면서 타인에게 폐를 끼치며 산다. 그 강도와 빈도는 다르겠지만, 조금씩은 서로에게 무례하기도 하고 서로에게 오해를 씌우기도 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 팀에 도움이 되고 싶다.‘라는 단순한 생각이 더 낫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때 나는 너무나도 소심해져 있어서 누군가에게 나의 의견 꺼내는 것도 어려웠다. 배려한다고 생각했지만 허울 좋은 껍데기였다. 위한다고 하지만 내 이기심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팀원들은 매우 협조적이었고, 나도 껍데기만 보면 매우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나는 이 문장을 씀으로써 그 기억을 긍정적으로 완결했다.


5학년 1학기를 다니다가 휴학했다. 기말고사를 앞둔 5월 말에 휴학을 결정했다. 자퇴와 휴학 중에 다시 돌아 올 가능성이 있는 휴학을 선택했다.

6월에는 정신과를 다니면서 잠만 잤다. 7월에는 종종 코인노래방에 가거나 부모님을 따라 고구마를 캐러다녔다. 8월에는 친구와 함께 추석 단기 아르바이트로 마트에 취직했다. 그와 동시에 떡공장에서 단기 떡포장 아르바이트도 했다. 돈이 급해서라기보다 어디서든 돈을 벌 수 있다는 감각이 필요했다. 9월에는 주 4일 8시간 빵집 마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11월 말까지 일하고, 직접 번 돈으로 1박 2일 서울여행을 다녀왔다. 서울이 꼭 외국 같아서 좋았다. 유명하다는 건 알지만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거대도시라는 점이 지방에 사는 나에겐 뉴욕, 시드니 못지않았다. 12월 달에는 발레를 배워봤다. 등이 굽고 조금만 움직여도 몸이 뻐근해서 자세를 교정하고 싶어서 집 근처 발레학원에 등록했다. 발레는 새로웠고 재미있었다. 23년도 1월에는 친구와 PT수업을 받았다. 그때 내가 마른 비만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빵집 다니면서 빵을 얻어먹긴 했지만 갑자기 살찔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으로 보아 확실히 근육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2023년도에 복학을 해서 졸업을 앞두고 있다.

학교를 다니면서 학교 공부 말고 하고 싶은 걸 해봤다. 웹툰도 그려서 올려봤고, 글을 써서 다른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공간에 올렸다. 하지만 학교 생활에도 충실했다. 졸업설계를 위해 새로운 프로그램도 시간을 내어 배웠고, 스스로 세운 목표에 만족하는 생활을 했다.

 아침밥은 집밥으로 스스로 해 먹을 것, 일주일에 세 번 이상 헬스장에서 달리기 할 것, 전동킥보드를 타는 건 그만두기, 시간을 촉박하게 쓰지 말고 여유 있게 움직일 것, 시간에 대한 강박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익숙해지도록 스스로에게 충분한 시간을 줄 것. 잠들기 전에는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거나 글을 쓸 것. 날씨가 좋은 주말에는 근처 공원에 나가서 스트레칭을 할 것. 하고 싶은 것을 미루지 말 것. 좀 더 멋있어질 것.


나는 종종 강형욱 님이 진행하는 견종백과를 봤다. 그때 보더콜리라는 견종 소개 영상을 봤는데, 보더콜리를 보면서 내가 떠올랐다.

 보더콜리는 학습능력이 뛰어난 견종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경(border) 지방에서 양치기 개로 살았기 때문에 보더콜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능이 높은 만큼 견주에게도 이 견종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요구하는데, 여러 가지 일을 경험시킬수록 더 뛰어나진다. 반대로 몇 가지 일만 반복적으로 시킨다면 그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보더콜리에게 공 물어오기나 원반 던지기 등 단순한 과제만 가르치면 그거 하나에 집착하는 성질이 생겨 문제 행동을 일으킬 수 있으니 다양한 자극이 필요하다. 나는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한 과제에만 집착해서 괴로웠다. 그래서 나도 스스로를 보더콜리 기르듯이 다양한 자극과 환경에 노출되도록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여전히 나는 새로운 것에 두렵고, 사람들이 의도한 바 그대로 움직이는 단순하고도 중독되기 쉬운 사람이다. 아마 나는 최면도 잘 걸릴 것 같다.



어릴 때의 행복하고 순수한 나는 기억 속에만 있을 것이다. 내가 만든 스스로의 틀에 갇혀서 괴로워하고, 두려워하면서 많이 변했다. 변한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후회하고, 원망하고 괴롭혔다. 과거의 나를 그리워하며 많은 기억들을 부정적으로 왜곡했으며, 미래에 대한 기대는 실망만 가져올 뿐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적어놓고 보니 생각보다 삶은 해석하기 나름이었다. 이제까지 나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해석의 여지가 나에게 달려있었다. 하나의 이야기가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장르가 되고, 다른 이야기가 된다. 스스로에게 비극을 선물할 이유는 없다.

지금은 괜찮지만 또다시 예전의 내가 너무 그리워지는 날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우화 속의 농부처럼 돈을 벌기 위해 무작정 내달리지도 않을 것이고, 로데오 경기에 참여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마 평생 준비되었다는 기분은 느낄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것도 내가 생각하기 나름이다.

나는 여전히 어린이 같겠지만 겉으로는 어른처럼 보일 것이다. 사실 이것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나는 내 안의 어린이와 잘 놀아주며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에게 화나서 예전의 나는 달랐는데, 하는 후회는 더 이상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kings of convenience - homesick

john mayer - the age of worry

kodaline - high hopes

post malone - myself

snow patrol - chasing cars

bibio - sleep on the wing

michael bubble - home

alec benjamin - older

conan gray - memories

liam gallagher - all you're dreaming of

sufjan stevens - mystery of love

ed sheeran - castle on the hill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야구 좋아하지 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