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오십 Oct 06. 2023

여전히 나를 기억하는 고향, 퀘렌시아.

kings of convenience - homesick


하늘이 높아지고 바람은 가을을 가지고 왔다. 날이 쌀쌀해지면 코끝에 닿는 공기 냄새에 설레기도 하고, 해 저물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겉옷을 여며도 그 쌀쌀함에 쓸쓸함이 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가을밤에 혼자 밖을 나서는 일은 거의 없었다. 반면 가을볕은 사계절 중에 가장 따뜻하다. 쌀농사 짓는 시골 할머니 집에는 황금들녘이 펼쳐지고 도로 가장자리에는 코스모스가 하늘거린다. 가을볕에 잔뜩 고개 숙인 벼가 지평선까지 펼쳐져있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화롭고, 또 풍족하다. 무엇보다 나의 태몽이 해 질 무렵 황금들녘이었다.



시골, 정확히는 전라북도 김제, 그보다 더 정확히는 김제보다 더 작은 단위의 조그만 마을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터를 잡으셨다. 엄마는 20살 이전까지 그 작은 시골에서 태어나서 자라났다. 엄마가 중학생 때였나, 어떤 날은 하굣길에 생리가 터졌다. 버스는 언제 올지 가늠조차 안 가고, 결국 논두렁 따라 이어진 비포장도로를 걸어가다가 가을볕에 아득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덩달아 무서워지긴 했다. 난 이제까지 엄마, 아빠와 차를 타고 명절 때 쾌적한 도로를 따라서 정겨운 할머니 집에 간 기억만 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나는 그곳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생각해보면 마음이 버거울 때, 엄마아빠가 있는 집보다도 할머니 집이 떠올랐다.



부모님은 나를 낳기 2, 3년 전에 다니던 보험회사를 그만두고 그들의 일을 시작하셨다. 작은 명함가게였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할 일이 많았고, 부부 둘이서 하는 사업이었기 때문에 손이 닿지 않으면 일이 굴러가지 않았다. 정말이지 어린아이들을 업고 일하기도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는 날이면 엄마는 삼촌을 불러서 언니와 나를 할머니집으로 보냈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삼촌이 사무실에 오면 장난도 쳐주고, 이따금 서점에 가서 만화책도 사줬다. 그리고 할머니 집으로 가서 잘 지내다가 왔던 것이 내 기억이다.


내가 할머니 집에 맡겨져 있을 때 할머니는 어린 손주에게 충분한 애정을 주셨다. 할머니와 튀밥을 바닥에 뿌리면서 먹기도 하고, 공중에다가 던지기도 했다. 물론 정리는 할머니가 다 하셨겠지만 나는 즐거웠다. 코카콜라 노래도 있었다. 할머니와 다리를 사이사이 포개놓고 코, 카, 콜, 라, 맛, 있, 다, 맛, 있, 으, 면, 또, 먹, 어, 또, 먹, 으, 면, 배, 탈, 나, 딩, 동, 댕, 동, 커, 피, 짠, 척, 척, 박, 사, 님, 알, 아, 맞, 춰, 보, 세, 요, 딩, 동, 댕, 동… 이렇게 할머니 다리 한 짝, 내 다리 한 짝 왔다 갔다 하면서 먼저 걸리는 사람이 지는 게임이었다. 쉽게 말하면 꽃잎을 떼면서 사랑한다, 아니다, 이런 꽃잎점과 유사한 게임이라고 보면 된다. 그것 말고도 손으로 하는 놀이도 있었다. 노래를 부르며 박자에 맞춰서 손바닥을 마주치는 놀이였는데 아직도 그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그 외에도 자연이 있었다.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논두렁을 함께 걸었다. 깻잎과 호박잎을 따서 집에서 된장과 함께 밥을 먹었다. 나비가 보이면 우와, 나비다! 감탄하며 즐거워했고, 꽃을 보면서 방글방글 웃음 지었다. 무엇보다 해질 무렵에 논길을 걸으면 온 세상이 황금이 되어서 내가 좋아하는 풍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커서 할머니와 엄마에게 듣는 어릴 때의 나는 제법 짠한 구석도 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함께 매일같이 논을 보러 나가면 제발 나가지 말라고 다리를 붙잡아 곤란하게 한다던지, 유모차에 태워 시장에 데리고 나가면 만나는 사람들이 잘생긴 손주 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던지. 무엇보다 반복해서 들었던 이야기는 감기에 걸린 나를 할머니가 병원에 데리고 갔던 날 일어났던 사건이다. 할머니는 접수를 하기 위해 잠시 나를 혼자 뒀는데, 그 사이에 나는 어린아이와 함께 병원에 온 젊은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젊은 엄마만 보면 우리 엄마인 줄 알고 따라가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도 그럴 것이 아마 6살 이전의 사건일 것이다. 엄마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미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엄마가 나를 짠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건이 하나 더 있는데, 이건 배경이 부모님 사무실이고 한창 바쁜 점심시간이다. 희한할지도 모르지만 자영업은 점심시간이 바쁘다. 점심시간을 통해서 맡겨놓은 명함을 찾으러 오는 사람도 많고, 또 일을 맡기러 오기 때문이다. 아무튼 언니는 유치원에 갔고 아직 유치원에 갈 나이가 아닌 나는 사무실에 딸린 4평짜리 방, 초록색 얇은 이불이 깔린 바닥에 누워있었다. 밥을 먹을 시간인데도 계속해서 전화는 걸려오고, 손님은 자꾸만 들어온다. 갈색 좌식 책상에는 차리다 만 밥상이 놓여있다. 아마 김, 반찬통 몇 개, 빈 밥그릇, 주걱, 참치캔 이런 것들이었겠지. 그중 참치캔. 밀려드는 일을 처리하고 늦은 식사를 하기 위해 아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을 때 아이는 참치캔을 들고 열정적인 식사를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알루미늄 캔에 손이 배인 줄도 모르면서 열심히 먹는 아이의 모습을 본 엄마는 많이 속상했을 것 같다. 태어나버린 이상 왕성한 식욕을 해결하는 야무짐을 기억하기보다는 엄마는 그 배고픈 아이에 대한 연민이 있나 보다. 할머니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연민이 많은 다정한 사람들이다.



몇 해 전 추석에 할머니와 손을 잡고 논두렁을 걸었다. 사춘기가 되고 조금은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명절 때만 겨우 들러서 인사만 하는 사이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할머니는 여전히 나의 할머니였다. 포근하고, 여전히 나를 어릴 때 그 모습으로 따뜻하게 바라보는 할머니. 우리는 변한 것들보다 서로 더듬을 수 있는 기억을 이야기했다. 억지로 말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걸어가는 논두렁은 이미 나를 알고 있었고, 지나가는 조금 쌀쌀한 바람도, 저물어가는 붉은 태양도, 바람에 묵직하게 머리를 이리저리 흔드는 황금색 벼도, 투박한 할머니 손을 잡고 걷는 그 풍경 속에서 나는 충만한 어린 시절을 다시 느끼고 있었다. 그때 할머니 건강에 대해서도 물어봤는데 무릎이 많이 안 좋아져서 앉았다가 일어나는 것도 바닥을 짚어야 겨우 일어날 수 있고, 무엇보다 기억력이 예전만 하지 못하다고 하셨다. 나는 그때 그 말을 쉽게 넘기지 말았어야 했다. 할머니는 지금도 조금씩 기억을 잃고 있다. 물론 치매를 지연시키는 약을 드시고 계시지만 지금도 가까운 기억을 자주 잊는다.



할머니는 이제 엄마랑 가서 산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나는 다섯 살, 여섯 살 즈음 완전히 엄마, 아빠, 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할머니는 종종, 아니 자주 파김치를 보내주셨다. 어린애가 그렇게 파김치 대가리를 좋아한다고, 파김치만 있으면 한 그릇을 뚝딱하는 게 신기하다고 했는데 아마 할머니와 같이 살면서 맛있는 할머니표 파김치를 먹어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싶다. 겨울이 되면 사골국을 진하게 우려서 삼촌을 통해 우리 가족에게 보내주셨다. 뽀얀 사골국에 소금과 대파쪼가리를 넣어서 밥을 말아먹으면 그만한 한 끼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할머니는 꽤 오랫동안 나를 먹여 살리셨다. 나뿐만 아니라 언니도, 엄마도, 아빠도.


그래서인지 할머니와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하나씩 다가올 때면 너무 슬프다. 가장 어린 시절의 나를 잘 알고, 가장 사랑해 준 할머니가 세상에서 없어지는 게 너무 슬프다. 기억을 못 하더라도 할머니는 영원히 내 할머니일 것이다. 어릴 때 가장 재미있게 놀아주고 많은 것을 보여준 사람에게 은혜를 갚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어떻게 하면 내가 아주 훌륭한 은혜 갚은 까치가 될 수 있을지, 일단은 할머니에게 안부전화를 드리도록 한다. 할머니가 어린이가 아니었지만 할머니는 아이가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이조차 모르는 가장 필요한 무언가. 젊은 시절의 할머니가 한 어린이에게 충만한 무언가를 선물했듯이 나 역시도 할머니가 무얼 원하는지 알 수 없지만 할머니에게 가장 필요한 무언가를 꼭 선물해드리고 싶다. 나에겐 그 무언가가 추억이라고 이야기되는 사랑의 어떤 조각인 것 같다. 할머니 집은 언제까지나 영원히 내 정신적 고향일 것이다.





아무튼 가을이면 볕에 익어가는 황금빛 들녘과 함께 할머니 집에 대한 향수가 짙어진다. 가끔 혼자 있다 보면 정말이지 너무 춥고,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을 때가 있는데 그런 날 개운하게 샤워를 마치고 잠들기 전에 kings of convenience의 Riot on an empty street 앨범의 homesick을 듣는다. 그러면 좀 괴롭고 힘든 마음이 가시고 집에 돌아온 기분이 든다. 나의 경우는 가을 할머니 집에 돌아간다. 따뜻한 가을볕이 드는 베란다에서 할머니 무릎을 베고 잠에 들락 말락 하는 기분 좋은 몽롱함, 그리고 자고 일어나면 눈앞에 반딱이는 홍시와 쇠숟가락이 놓여있을 것 같다. 그렇게 잠에 들고일어나면 그럭저럭 어제의 힘든 기억보다는 그래도 나는 여전히 나를 기억해 주는 고향이 있다는 생각과 함께 눈을 뜰 수 있다. 도망치고 싶고, 내가 완전히 망해버린 것 같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일 때 이 음악을 전해주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방황은 낙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