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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리안러버 Mar 17. 2023

발리에서 만든 첫 김치

 발리에 처음 와 세 식구가 홈스테이들을 떠돌다가 아무 것도 없이 고칠 것 천지인 지금 집에 안방 침대만 덩그러니 받아놓고 이사왔을 때 새근새근 자는 아이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어둠 속에서 이런 얘기를 했었다.


    "아마 가구도 조금 들이고 이것 저것 고치고 '아 이제 좀 사람 살만한 집 같다' 하는 생각이 들 때쯤이면 우린 아마 1년 계약이 끝나서 딴 집 찾고 있을꺼야 그치?"

    "언제쯤 우리 물건 서랍장에 다 보관하고 식탁에 앉아서 밥 먹고 소파에 앉아 티비 볼 수 있으려나...?"

소파도, 식탁도, 심지어 부엌 찬장도 제대로 없는 집에 들어와 살려니 너무나 당연했던 것들이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나는 말야... 이 집에서 당신이 김치 한 번 만들고, 내가 막걸리 한 번 만들고 나면 비로소 우리가 이 집에 살고 있구나 생각이 들 것 같아"


한국에서 내 또래의 친구 중에는 막상 김치를 집에서 만드는 친구들이 없는데 너는 외국인이랑 결혼해서 외국 나가서 살면서 꼬박꼬박 김치를 그렇게 담궈먹는게 웃기다는 엄마의 우스갯소리처럼 나는 결혼한 이후 싱가폴에서 살면서 내 입맛에 맞는 김치를 찾아 사먹느니 내가 해먹겠다는 생각에 방 한칸짜리 싱가폴 집에서도 신생아 아이를 재워두고도 남편과 김치를 담궜다. 한국 식재료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싱가폴이었기에 김치 재료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때마다 친정엄마 찬스로 한국 고춧가루를 받아 김치를 만들어먹곤 했는데 냉장고가 좁아 자주 조금씩 만들어 먹어야했다. 남편은 냉장고 김치가 떨어져갈 때면 '김치 적색경보'라며 그 만의 응급함을 나에게 알려오곤 했고 냉장고가 다른 음식들로 가득 차 있어도 김치가 다 떨어져갈 때면 내겐 냉장고가 텅 빈 것같이 느껴졌다. 그 즈음 남편은 한국 막걸리의 매력에 빠져 내게 한국에서 누룩을 사와달라고 부탁을 해 본인이 직접 막걸리를 빚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 싱가폴의 좁디 좁은 집의 작디작은 냉장고에는 유축한 모유도 얼려있었고 남편이 빚은 막걸리도 있었고 내가 만든 김치도 채워져있었다.


김치와 막걸리를 만들고나면 내 집이라는 생각이 들꺼란 남편의 말에 나도 공감했다. 김치를 만들려면 큰 김치통도 필요하고 액젓, 매실액도 필요하고 냉장고도 필요하고, 막걸리를 만들려면 쌀도 필요하고 찜기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다가오는 끼니에 급급했던 지난 6개월을 뒤로하고 김치와 막걸리를 만들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는 뜻일테니 말이다.


그리고 어제 우리는 드디어 이 집으로 이사온 지 두 달만에, 발리로 온지는 네 달만에 집에서 고장나고 부족했던 모든 것들 - 더러운 지하수, 물 끌어올리는 펌프, 고장난 변기, 부러진 계단 손잡이, 냄새나는 하수구멍, 더러웠던 화장실 벽과 타일, 망가진 두꺼비집, 계속 꺼지던 형광등, 주문한지 한 달인데도 도착하지 않는 가구들 등등 헤아릴 수 없는 골칫거리들을 마침내 뒤로하고 김치를 만들었다. 싱가폴보다 싱싱하고 값싼 야채들로 만든 우리 집 김치는 과연 맛이 어떨지, 이 곳에서의 우리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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