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우연사전

[우연사전]: (31) 열과

우연히 발견한 단어로 필연한 문장을 씁니다.

by 두리뭉실

열과 (裂果)

명사

1. (식물) 익으면 씨를 담고 있는 껍질이 저절로 벌어지면서 씨가 땅에 뿌려지는 열매. 건과의 일종으로, 완두, 나팔꽃, 무 따위의 열매가 있다.




이제는 여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흘러간 것과 보낸 것은 다르지만

(중략)

자고 일어나면 어김없이
열매들은 터지고 갈라져 있다
여름이 내 머리 위에 깨뜨린 계란 같았다

더럽혀진 바닥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여름을 다시 쓰일 수 있다
그래, 더 망가져도 좋다고

(후략)

- 안희연, <열과(裂果)>,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님의 가장 좋아하는 시집에 수록된 가장 마지막에 있는 시이다. 파괴하고 저물어가는 생명으로부터 새로운 생명력의 힘을 엿보는 안희연 시인님의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작은 희망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용기와 에너지를 얻을 수 있게 되는 마력이 있다.


위 작품도 동일하다. 일정한 온도 혹은 시기가 되면 열매는 수명을 다하고 터지고 갈라진다. 바닥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과일의 잔해들은 마치 얼룩이 져 더럽고 때로는 피를 흘린 듯 잔혹하다는 기분이 들지만, 그 파괴 속에는 작은 씨앗들이 숨어 있다. 견디기 힘든 여름 때문에 열과는 끝을 다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열과의 종말 덕분에 새로운 열과가 탄생하며 그렇게 여름은 다시 쓰일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언제나 평탄한 삶을 살기란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못 견디기게 뜨거워 타들어갈 것 같은 상황에서 결국 터지고 무너지고 다치는 일도 많다. 심지어 그 당시를 겪었던 나의 일부분은 아예 연소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연소로 인한 결과는 무가 되는 것이 아닌 또 다른 빛과 열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도출해 낸다.


내가 서 있는 곳이 더럽혀져 있기 때문에 그리고 나의 과거의 여름과 절망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나의 미래를 말할 수 있다. 그 미래가 여름이든, 절망이든 상관없이. 그때부터 우리는 망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상실하고 더 초연하게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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