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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 알고리즘 16 : 뜻밖의 하루

by 여기반짝


넥스트 유니버스의 홀로그램 스크린에는 사용자 데이터가 쉴 새 없이 흘렀다.

회사의 주가는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준원이 피해자 가족들을 일일이 설득한 덕인지, 소울링크가 이미 일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의 분노는 소울링크의 쾌락 앞에서 무뎌졌고, 5점짜리 별점 후기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지혁의 모니터 마지막 홀로그램에는 준원이 놓고 간 국가사업 제안서가 떠 있었다.

정교한 기술은 마법같이 스며든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길을 잃는다. 정부는 기술의 폐해를 기술로 해결하려 했다. 준원은 감정 알고리즘이 인간의 현실적 행복을 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치열한 토론 끝에 ‘사업성 없음’으로 결론 내렸던 프로젝트였다.


‘기술이 공공성을 입으면 퇴행하게 돼.’


홀로그램 위로 뉴스 피드가 쏟아졌다. 상승하는 주가, 신규 접속자, 그리고 광고.

모든 욕망이 하나의 화면 위에서 교차했다.


그때 홀로그램에 알림이 떴다.

메시지를 보는 순간 프로젝트 보고서와 회사 주가 따위는 의식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네. 아직요.]


하루를 넘긴 단답이었다.

확률은 '그녀의 거절' 쪽으로 기울었다. 지혁은 그녀의 현재 심리 상태에 대한 수백 개의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했다. 성공을 위한 집념과는 달랐다. 확률 데이터가 어떻든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소울링크의 데이터베이스에서 ‘신애수’와 유사한 여성 그룹이 선호하는 장소 유형을 레퍼런싱했다.

공원을 끼고 있는 낡은 재즈카페.

그리고 애수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오늘 저녁 7시. 율동 ‘블루 노트’.]


예약자 이름이나 완료라는 말은 없었다.

그저 사실을 통보하는 짧은 문장이었다.





그녀가 카페에 도착했을 때, 지혁은 이미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그녀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매력적인 남자 배우의 미소를 완벽하게 연습했으나, 애수를 보는 순간 눈과 입이 먼저 반응해 웃어 버렸다.


'계산을 벗어난 웃음이라니. 방금, 바보 같았어. 젠장!'


그는 짧은 인사를 건네고 그녀의 의자를 빼주었다.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음대생으로 보이는 피아니스트 반주와 중년 여가수의 음색은 단풍처럼 붉고 깊었다.

Fly me to the moon. 지혁은 낯선 들뜸이 생소했다. 몸이라는 게 마음을 따라 중력을 거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카페의 시그니처 블렌딩입니다. 그리고 당신 SNS에서 가장 많이 ‘좋아요’를 받은 디저트 유형과 97.3% 일치하는 치즈케이크죠.”


대화는 그가 능숙하게 리드했다.

그는 재즈의 즉흥성에 대한 기술적 분석으로 시작해, 자연스럽게 그녀의 일상 이야기까지 이끌어냈다.

애수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리드에 기분 좋은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상담이라는 건, 정답을 주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지지해 주고 그냥… 버텨주는 일인 것 같아요. 삶의 답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으니까요.”


애수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자신의 직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이었다.

지혁은 계산했다. 프로토콜 3단계 '상대의 열정에,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지적인 칭찬을 건넨다'는 것이다.


“당신의 그 전략적 상술은 효율적이군.”


말이 헛나와버렸다. 회사 재무를 평가하듯 애수의 상담을 분석하다니.

‘공감’이나 ‘헌신’ 같은 단어는 미처 연습하지 못했다. 다행히 와인에 살짝 얼굴이 붉어진 애수는 긴장한 탓인지 그의 칭찬에 부끄럽게 웃을 뿐이었다.


그때, 가수가 쓸쓸한 눈빛으로 다음 노래를 시작했다.

'어느 하루 비처럼 흩날리는 거리에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 곡은 원작시로 읽어도 여운이 남지. 왠지 애달파지더군."

"시를 좋아해요?"

"수만 가지 단어를 조합해도 AI 인간의 대화가 마음을 관통하지는 못하더군요. "


지혁은 고독과 애상을 다룬 시집은 내면에 대한 통찰이 깊어 선호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고독에 대한 이해가 자신의 '감정 알고리즘'의 효율에 기여할 것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의 취향에 따른 대화의 리드, 역시 소울링크 시뮬레이션은 오늘 도움이 되었다.

애수는 상념에 잠긴 지혁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의 유명인도, 유기견 보호소 동료도, 내담자도 아니었다. 그저 인간이었다.

서늘한 이마와 날렵한 턱선. 그 위로 그녀만이 아는 지혁의 과거가 겹쳐졌다. 애수는 그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물었다.


“그렇게 완벽하게만 살면, 가끔은 좀… 외롭지 않아요?”


그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수십 개의 모범 답안이 있었다.

하지만 와인잔을 든 채, 희미한 조명 아래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붉어진 옆모습을 보는 순간, 그의 모든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그는 입을 열지 못했다.

감정 알고리즘, 효율, 데이터—

오늘만큼은 그 모든 단어가 멀게 느껴졌다. 그리고 온전히 심장이 두근거리는 감각을 느꼈다.

소울링크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예의를 가장한 만남이 끝날 때마다 늘 느꼈던 해방감이,

오늘은 없었다.








두 사람은 지혁의 차에 올랐다.

자율주행 모드로 설정된 차가 부드럽게 움직이는 순간, 애수의 스마트폰이 날카롭게 울렸다.

화면에는 ‘김민준 님 어머님’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여보세요? 어머님, 괜찮으세요?”


수화기 너머로,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로운 오열이 터져 나왔다.


“민준이가… 우리 민준이가… 방금 날 불렀어요… 창밖에서… 계속 날 부르고 있어요, 선생님…! 이제 그만 따라오라고… 엄마 힘들었지, 이제 같이 가자고…!”


애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차분하고 단호하게 어머니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머님. 제 목소리 들리세요? 지금 창문 말고, 저를 보세요. 제 목소리에만 집중하세요. 민준 씨가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했는데요. 그렇게 쉽게 어머니를 데려갈 리가 없어요.”


이십 분이나 지났을까.

수화기 너머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지만, 여기서 마칠 만한 대화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어머니가 자식의 망령에 고통받고 있었다. 기억에 매달린 인간의 절망과 고통이 날것 그대로 전달되었다. 홀로그램과의 채팅이 아닌 바로 옆자리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한 사람을 구하려는 애수의 노력은 간절했다.


“미안해요. 저… 가까운 지하철역에 내려줄 수 있어요?”


지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의 어머니가 스스로 답을 찾도록 말없이 버텨줄 생각이리라. 고독은 고독을 부르는 법이라 출구가 되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건 지혁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차가 역 앞에 멈추자, 그는 재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감기 걸리지 마시길”


그 말을 끝으로, 차는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그날 밤, 녹초가 된 애수의 침대 위에서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강지혁이었다.


[JH]: 무사히 귀가했습니까?

[애수]: 네, 덕분에.

[JH]: 내일 기온은 9도. 감기 걸리지 않도록.

[신애수]: ㅋㅋ 천재 개발자님 일기예보네요.

[JH]: 내 시스템이 그쪽 무릎 관절보단 정확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매일 들려주어도 될까?

[신애수] : 네, 저는 좋아요... 너무너무 좋아요. 재킷은 주말에 돌려드릴게요.

[JH]: 그 재킷은 이탈리아 장인이 한 땀 한 땀 바느질한 내가 제일 아끼는 옷이야. 그 옷이 없이는 내 스타일이 완성되지 않으니 내일 찾으러 가야겠어.


애수는 피식 웃었다. 이 티격태격하는 대화의 온도가 싫지 않았다.


[JH]: 아까 그 사람.

그는 잠시 망설였다.

얼핏 스쳐간 내담자의 아들 이름은 '민준'이었다. 고요한 밤이면 머릿속을 부유하던 그 이름이었다.

애수에게 [민준이라는 이름이 맞나]라는 글자를 입력했다. 그러나 잠시 후 방금 썼던 글자를 전부 지웠다. 꺼림칙한 감각이었다.


[JH]: 피곤할 텐데, 쉬도록.


대화가 끝났지만, 지혁은 잠들 수 없었다.

논리 아닌 직감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본능적 감각이었다. 스마트폰 너머 들리던 꺼져가는 노부인의 목소리, 가까운 거리에서 느껴지던 그녀의 숨결 같은 호소들. 비논리적인 충동이 온몸을 잠식했다.


그날 밤, 지혁은 아주 오랜만에 다시, 끝없는 검은 물속으로 빠져들었다.

꿈의 한가운데에서도 ‘민준’이라는 이름이, 그의 무의식에 또렷한 파문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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