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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문장] 달 포도 잎사귀

장만영 시

by 여기반짝








오감이 선사하는 호젓함


유독 모든 감각이 예민해지는 밤이 있습니다. 그런 밤을 기억합니다.

잠에 들기를 포기하고 생각에, 독서에, 집안일에도 기웃하다 창밖을 보면, 시간의 개념에 무뎌집니다.

내가 지구의 시간과 멀어진 존재가 된 것 같아 , 두려워지기도 합니다.


그럴 땐 거실에서 라디오를 켜죠.

'새벽 3시 30분입니다.'

시간이라는 개념은 참 현실적입니다.

지금 이 시간의 선곡을 들으면,

먼 우주에서 다시

지구인으로서 중력을 지탱하고 있다는 안정감이 들죠.

달빛을 동경하다가도 다시

대지 위로 시선을 돌리고

계절의 오감을 느끼는 시인의 마음도 그러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청각에서 시각으로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레미 드 구르몽, <낙엽> 중에서


가을밤은 소리로 먼저 우리를 감쌉니다.

그 '바스락'하는 소리가 가을의 소멸과 쓸쓸함을 상징하는 청각이라면, 장만영 뜰의 벌레 우는 소리는 조금 다릅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도 사그라들지 않는 '생명의 소리'입니다.


그 고요한 소리를 따라 읽노라면, 밀물같은 달빛에서 드뷔시의 <달빛>이 떠오릅니다.

달빛을 폭포처럼 쏟아내지 않기 위해, 온음과 온음 사이를 지탱하는 반음이 마치 은반 위의 요정처럼 공기를 타고 흐르고 있어요. 실은 온음보다 반음이 더 많아 아슬아슬한 느낌이 신비롭죠. 아르페지오 소리가 은은하게 번지다가, 화음이 일렁이며 서서히 공간을 채우는 달빛의 감각.

뜰을 가득 채운 이 선율 속에서, 시인은 이 밤의 색깔을 새롭게 정의합니다.

후덜덜하다...


https://youtu.be/MgHieo91m_g?si=GEOF6Cxjv3lYe67O





시각에서 후각으로

달빛은 뜰에 내려앉아 향기를 입습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니. 이 시에서 제가 가장 매력을 느끼는 구절입니다.

무겁고 농염한 머스크 향기가 아니라, 이슬을 머금은 풀과 흙냄새를 베이스로, 살구나 복숭아를 미들 노트 삼는 달콤한 향수. 이 향이 하늘과 땅을 이어 갑니다.



후각에서 다시 시각으로

시인이 만들어 난 달빛 향수는 다시 시인의 눈을 다시 밤의 본질로 이끕니다.

그것은 '동해 바닷물처럼 / 푸른 / 가을 / 밤'입니다.

희고 노란 달이, 동해 바다 같은 푸른 밤과 보랏빛 포도를 비추는 색채의 대비가 퍽 신비롭습니다.

노랑과 파랑은 보색인 줄로만 알았는데, 강렬함보다는 완전한 포용으로 보이거든요.



시각에서 촉각으로

달과 포도는 푸른 밤 속에서 마침내 만납니다.

만남의 방식은 '스며들다', '머금다'.

달빛은 포도알의 얇은 껍질 안으로 '스며들어' 과육과 하나가 됩니다. 포도알은 그 달빛을 기꺼이 '머금어' 제 몸을 채웁니다. 잎새들은 달빛에 젖어 있죠.

시인은 대지의 자연이 빛을 수용하는 과정에 모든 오감을 동원하지만, 결코 관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마지막 연, 촉각에서 마침내 생명력으로

이제 달빛은 디오니소스의 포도를 빚어내는 신성함이며,

뜰을 생명으로 충만하게 만드는 보살핌으로 보입니다.

포도를 키우는 건 뜨거운 태양만은 아닌가 봅니다.

포도는 물기를 머금은 달빛으로

제 살을 키워 나가는가 봅니다.


'순이'하는 다정한 부름은

이 벅찬 감동을 나누고픈 마음일 겁니다.


'이 가을, 이토록 신비롭고, 충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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