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대학교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1학년이던 시절 졸업학기를 다니던 08학번 남자 선배였다. 그 당시 학교에서는 신입생의 학교 적응을 돕는다는 취지로 과 단위의 학생회들이 크고 작은 멘토링을 했었다. 나는 여섯 명 정도 되는 동기들과 한데 묶여 한 명의 멘토에게 배정을 받았는데 그 멘토가 졸업학기의 08학번 선배였다. 나의 소중한 독자들 중 동문들도 있으니 이름은 가명(돌)으로 쓰겠다.
돌은 단단한 사람이었다. 과거형으로 쓰는 이유는 현재의 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아무 힌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굴을 못 본 지 삼 년 정도가 되었다. 그 시간은 충분히 한 사람을 예측 불가하게 바꿔놓고 혹은 놀랍도록 그대로 두는 시간인 듯하다. 그런 면에서 돌이 이제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는 상상으로만 짐작할 수 있다.
그 시절 돌은 키가 크고 몸집도 큰 편에 속해 큰 백곰을 보는 듯한 외형을 지녔다. 그 덕에 멀리서도 내가 쉽사리 위축되었다. 그는 말도 거칠고 늘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있거나 들고 있지 않으면 입에 물고 있어서 세상의 풍파를 모조리 겪은 중학생을 보는 듯했다. 거친 말과 농담으로 세상에 지고 싶지 않은 중학생들의 사춘기와 조금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면담 시간에는 늘 어른의 면모를 보였다.
우리는 공강 시간에 중앙 도서관 앞에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면담을 했다. 공식적으로 짜인 면담은 아니고 캠퍼스를 지나가다 마주치면 갑자기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식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6년의 인생을 먼저 산 사람으로서 6년 치의 노하우와 그만큼의 쓴맛을 알려주었다. 문학도가 밥벌이를 하는 것에 있어서, 돈이 안 되어도 시가 좋은 이유에 대해서, 그럼에도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앞날이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지만 흘러가는 하루에 대해서. 인문학도들의 고뇌였다. 물론 새내기인 나는 이제 막 입학해서 그 번뇌를 깊숙이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때마다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는 자의 주름을 보며 그것이 단단한 어른임을 느꼈다.
"어, 오빠 웬일이에요?"
화면 너머 보이는 뜻밖이고도 반가운 이름에 전화를 들었다. 프라하에 오고 처음으로 온 전화였다. 돌에 대한 회상은 짧게 마치고 인사를 건넸다.
"어, 잘 지내나, 아니 내 뭐 좀 필요한 게 있어가지고. 너 대학원 가고 싶다 하지 않았나? "
대구 사람인 돌은 사투리가 여전했다. 돌을 돌답게 만들어주는 리미티드 에디션 옷 같은 억양이다. 동기들은 돌의 억양을 따라 하며 '히야(형)'하며 놀곤 했다. 그것도 어느덧 7년의 세월이 지났다.
한편 돌 역시 나에 대한 기억이 몇 년 전에 머물러있었다. 나는 프라하에 오기 전 그리고 온 직후에도 선생님에 대한 꿈에 미련이 남아, 한국에 있는 교육대학원 진학을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은 한국어를 가르치며 그 생각을 많이 접었다.
"아, 오빠 저 아직 프라하예요. 그리고 대학원 생각은 이제 좀 많이 정리했어요. 여기서 좀 더 있어보고 싶은 맘도 있고요."
"아 그래? 음, 알았다. 아니 내 뭐 매형이 도와달라카는게 있어가지고. 주변에 영문학으로 석사인 사람 좀 구해야 하는데, 암튼 알았다. 잘 지내나?"
그는 용건을 간단히 말하고 안부 이야기를 꽤 오래 전했다. 돌답지 않다고 느꼈다. 용건만 간단히 하고 대화를 마무리짓는 돌이 내 기억 속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내 기억이 매정하게 그를 왜곡한 것인지 몇 년 사이 그가 변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는 내가 프라하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어디에 사는지 등을 툭툭 묻고 열심히 들었다. 그럼 나는 툭툭 오는 질문에 내가 프라하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잘 지내고 있고 프라하 성 근처에 데이비츠카라는 지역에서 지내며 당분간은 여기 있을 생각이라는 안부를 전했다. 그는 통화를 하며 동시에 구글 맵을 켜, 프라하 성이 어디 있는지를 찾더니 네가 여기 있는 것이냐며 신기하다고 말했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근데, 너 한국 오는 게 낫지 않나? 한국어 선생님이면 한국에서 제대로 공부해서 대학원도 나오고, 또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한국에 와서 지내는 게 더 낫지 않나?"
그런 말을 들으면 괜히 반감이 든다. 당분간 이곳에 있겠다고 생각했으면서도 프라하에서 삶을 버틴다는 느낌이 들 때면 그런 말을 떠올리며 더 잘 흔들리기 때문이다. 본의 아니게 약간의 반감을 품고 반문했다.
"왜요?"
그러자 돌은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돌은 학교 근처인 복정을 떠나 멀리 강화도에서 일을 하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요즘 텔레비전에도 많이 나오는 유명한 요리사 밑에서 주방을 일을 하고 있다며, 정신 차려보니 내가 그릇을 닦고 있고, 어찌어찌하다 보니 프라이팬을 잡고 있고, 또 흘러 흘러가다 보니 보조를 맡았다며 그가 식당에서 보낸 세월을 짧고 간단하게 요약해주었다. 정신 차려보니 보조까지 맡게 된 사이 정신을 못 차리게 일을 열심히 했구나 싶었다. 그 마저도 웃으며 쓴 농담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참 돌다웠다.
화면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밝았다. 그 일이 돌을 작아지게 만드는 일은 아닌 듯했다. 잘된 일이었다. 어떤 일은 하면서 나를 작아지게 만들기도 한다. 돌이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일을 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가 조금 작아졌다고 느낀 순간도 있었다. 그가 강화도에서의 삶이 외롭다고 말할 때였다. 본가로 두 시간이면 차를 몰고 갈 수 있다지만 막상 일을 하다 보니 가족도 친구도 잘 못 만나는 듯했다. 특히 식당 일의 특성상 명절에 쉴 수가 없어서 가족이 모두 모이는 날에 꼭 빠졌다고 했다.
홀로 보내는 명절의 쓸쓸함은 프라하에서 나를 흔들리게 하는 몇몇 중 하나였다. 이곳에 있기에 평범한 날을 특별히 보낸 추억도 있지만, 본의 아니게 특별한 날을 평범히 보내야 하는 시간도 늘었다. 추석이나 설날에는 꼭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화면 너머 보이는 가족과 친척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화면 속 가족들은 분주해 보였다. 명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가족이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정신이 없고 분주해지는 시간이다. 친척동생은 화면에서 볼 때마다 무럭무럭 자라 있었다. 그럴 때면 괜히 마음이 아팠다. 그 변화를 내가 놓치고 있다는 것이 마치 인생의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그들과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 실감 나게 했다.
돌도 이런 마음을 안고 강화도에서 프라이팬을 잡고 음식을 만드는 듯했다.
"아 역시..."
역시 타지 생활을 해서 돌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하고 말하려던 찰나, 돌은 내 말을 자르며,
"역시 뭐 뭐!"
하곤 왕왕 짖듯이 말했다.
7년 전 중앙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앞날이 어떻게 흘러갈지 이야기할 적부터 자신의 연약한 점을 드러내는 데 낯설어하는 돌이었다. 약한 점을 고백하고 나면 돌연 거친 농담으로 으르렁거렸던 그때가 생각났다. 돌은 이제 자신의 나이가 서른셋이라며 스물일곱인 너는 젊고 좋을 때니 뭐든 하라는 말을 남겼다. 6년 치의 조언을 잊지 않고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돌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남은 안부를 다 묻고 통화를 마쳤다. 각자의 방에서 목소리로 짧게 만나 흩어지고 본래의 공간과 시간으로 돌아왔다. 돌은 이제 잘 준비를 하고 나는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강화도와 프라하에서 서로의 안위를 걱정했다. 이럴 때면 같이 있어도 만날 수 없는 사이와 떨어져도 만나는 사이에 대해 생각한다. 화면 속 그대들에게 많이 의지하고 정을 주는 나는 프라하에서 만날 수 있는 사이에게도 정을 주고 의지하고 싶다며 소망한다.
돌의 마음을 채워주는 무언가도 강화도에 생겨나길 바라며, 강화도에서 돌이 그것을 만들어가길 바라며, 화면 너머 보이는 그대들과 인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