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가 돌아가셨다. 단톡방 속 엄마가 올린 이모 이름 석자의 부고 소식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의 사촌 언니가 나의 이모와 동명이인이려니 생각했다. 사촌 간에 이름을 똑같이 짓다니 별일이라 생각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소식에 나의 이모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모부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더 믿기지가 않았다.
이모부가 돌아가신 지 꼭 2개월 만이다. 고인이 되신 이모부께는 선 듯 다가서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었다. 갑자기 높아지는 언성에서 끝없이 늘어지는 하소연에서 돈 쓰는 걸 싫어하는 모습이 엿보임에서 좀스러움이 느껴지기도 때론 알지 못할 한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런 이모부가 다른 간병인도 싫고 오직 이모만 옆에 있으라 성화셨다고 했다. 이모부가 지병을 앓으신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모는 하던 일을 접고 이모부와 함께 계셨고 명절에도 외할머니의 생신에도 뵙기가 쉽지 않았다. 여름을 앞둔 어느 날 이제는 병원에서 더 이상 손 쓸 방도가 없다며 요양원으로 모시라 했다는 근황을 알리는 단톡방의 글에서 이모가 느끼는 안타까움이 전해졌다. 3개월 정도를 예상한다고 했다. 나는 가을쯤 예상되는 이모부의 장례식 참석 의상을 만들어 볼 생각으로 검은색 원단을 떼다 놓고 언제 만들까. 조금만 더 더위가 지나면 만들까. 어떻게 만들까. 한참을 고민했었다. 그렇게 이모부의 장례식은 언제쯤 치르게 될 거라 예상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모의 부고는 너무나 급작스러웠다. 심장마비라고 했다. 답답함이 느껴져 위내시경은 해보았지만 심장에 관련 있으리라 생각지는 못했던 모양이었다. 기대했던 이모의 화려한 싱글라이프가 못내 아쉽다. 먼저 고인이 된 이모부에 대한 안타까움은 있었지만, 한편으로 이제 이모는 조금 해방된 생활을 하겠구나 생각했다. 당분간 마음은 편치 못하시겠지만 곧 적응하시리라 생각했다. 이모의 자녀인 H와 B가 가정을 이루고 남매간에 우애 있게 지내며 이모와도 가까이에서 살고 있다기에 금방 일상생활로 돌아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길 두려워 않던 이모가 이번엔 어떤 도전을 하실까 기대도 하고 있었다. 봄이 되면 이모는 딸인 H와 함께 손주들과 꽃놀이 다니시리라 상상하고 있었다. 한동안 H의 아들 사진과 B의 딸 사진이 단톡방에 도배되리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이제 봄이 되어도 꽃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도배될 리 없는 단톡방이 아쉽게만 느껴진다.
두 달 전 장례식장에서 나온 문어를 보며 이모부를 생각했다. 간간이 외가행사에 오셨다. 어쩌다 문어가 있는 날은 제대로 된 잔치상이라며 좋아하셨다. 당신의 고향에서는 잔칫날 문어가 없으면 잔치 준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라 욕먹을 일이라 하시며, 문어가 준비된 뭘 좀 아는 제대로 된 잔치라며 기뻐하시던 모습이 인상 깊었다. 기억에 얼마 없는 이모부의 밝은 모습이었다. 먹기 좋게 썰려 나온 문어가 반가우면서 이내 이모부가 생각났던 것이다. 나는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문어를 보며 기뻐하시던 이모부를 떠올리게 될까... 이렇게라도 고인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이번 장례식장에서 만난 문어는 반갑지가 않다. 이모부가 또 떠올라 원망스럽다. 뭘 또 그리 이모를 찾아대셔서 빨리 오라 성화셨냐고. 문어가 담긴 접시에 손이 가지 않는다. 남겨진 나의 사촌 H와 B가 안타까워 마음이 아파왔다. 어린 시절엔 외가 어른들이 H에게 언니라 부르라 했었다. 10살쯤 되었을 때 나와 동갑인걸 알고 그간 언니라 부름을 억울해했었다. 나는 아직 겪어보지 못한 일을 이 가을에 다 겪어내고 있는 저 이가 나보다 언니가 맞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먼저 떠난 이가 누리지 못한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이 몰려왔다. 떠난 이를 그리워할 이들에 대한 사무침을 가늠해 본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가 될지 모르지만, 그 시간이 짧아 가슴이 더 아플지 길어 행복할지 알 수 없지만, 나도 언젠가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의 사무침을 겪게 되겠지. 그 사무침이 어느 정도 일지 가늠도 되지 않아 그 슬픔이 최대한 천천히 오기를 바라본다.
갑자기 다가온 이별이 더 아쉬운 이모를 이제 보내주어야 한다. 지금쯤 이모는 이모부를 만나셨겠지. 이모부는 애들 좀 더 챙기고 오지 벌써 왔냐며 뜬금없는 역정을 내실까. 잘 왔다며 반가워하실까. 어쨌거나 내가 아는 이모라면 “고마시끄럽다! 고마해라!” 하실듯하다.
이모, 어려운 시절에 가진 것 많지 않은 집의 맏딸 노릇 하시느라 고생 많으셨다고 들었어요. 전해 들은 이모의 활약상을 저라면 못 해냈을 거 같아요. 저도 맏딸이지만 좋은 시절에 태어나 그런 희생 없이 살아온 걸 다행이다 생각했어요. 사실... 이모부가 부러울 만큼 좋은 남편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고마시끄럽다! 고마해라!”라고 이모가 나무라시면 이내 주춤하시던 모습에 나쁜 분은 아닌 걸 알았어요. 그렇게 외치는 이모도 멋있다고 생각했고요. 저는 당분간 문어를 보며 이모부를 생각하기도 원망하기도 할거 같아요.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이모가 갑자기 가심은 이모부 탓이 아님을 인정하게 되겠지요. 그때는 제대로 된 잔치상이라며 문어를 반기시던 이모부의 기뻐하시는 모습만 기억하도록 할게요. 봄에 꽃이 피면 우리 이모 꽃 좋아하셨는데... 생각할 거 같아요. 꽃이 피면 저는 엄마랑 꽃구경 가서 이모는 딸 H랑 같이 이렇게 좋은 꽃구경도 못하고 안타깝다란 이야기도 할 거고요. 외할머니 생신 때는 함께 모여 이모는 여행 갔다고 그냥 그렇게 말씀드리고 씩씩하게 잔치해 드릴게요. 제가 H와 B에게도 종종 연락하며 지낼게요. H의 생일이 있는 3월에 꼭 연락할 거고, B의 생일이 있는 9월에도 꼭 연락해서 축하 전할게요. 마지막 말을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만 줄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