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로 몇 분 안에 들통날 것을 둘러대는 모습에서 연민과 환멸이 교차한다. 일그러진 경선의 얼굴을 재빠르게 알아챈 제임스가 거실을 휘 둘러보며 팔짱을 낀다. 그제야 털이 묻은 담요, 부서진 팬등을 큰 비닐에 담기 시작하는 젊은이들의 부자연스러운 동작을 말없이 지켜본다. 경선은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내부 구석구석 사진을 찍었다, 누군가의 흔적을 기록하기 위해서 혹은 보호하기 위해서. 제임스에게 뒷일을 맡기고 자리를 피하듯 나온다.
I'm Chinese'라는 말이 방패가 되어주는 사회, 책임을 피할 때 외치는 주문이다.
저녁에 누워 아이들 얼굴을 떠올렸다. 두부처럼 보드랍고 생글거리는 얼굴들이 뭉게뭉게 떠오른다. 아이들을 매일 볼 수 있는 일터에 있다는 것이 안정감을 주고 있었다. 경선은 학부모들과도 가능한 잘 지내고 싶어 했다. 방문하는 집안에 과하게 꾸며진 가구들과 인테리어들을 보고 감탄하며 어머니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일 정도는 센스고, 책장에 꽂힌 책들을 보며 어머니들의 교육 투자에 대한 씀씀이를 가늠해 보는 일 또한 매우 중요했다. 사람을 가늠하는 일이란 정확함보다는 융통성이라는 생각을 한다.
승민, 해민 쌍둥이의 집의 문이 열리자 아이들이 달려와 한 번에 쑥 안겼다. 한 번은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아이들이 현관 밖에 나와 까르르 웃으며 환대했다. 바닥 이쪽저쪽에는 널어진 장난감을 피해 거실 중앙에 놀이용 매트에 어린이 책상이 놓여있는 곳에 앉는다. 흘깃 보니 소파에는 건조기에서 꺼낸 빨래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사내아이 둘을 키우는 젊은 엄마의 고단함을 알기에 이해할 수 있다. 수업 후 아이들 학습 상담이 이어졌고, 경선은 자연스레 소파에 손을 가져가 수건을 한 장 들고 둑 털어 귀퉁이를 맞추어 접는 손이 자연스럽다.
"어머니, 아이들 키우면 다 이렇죠. 다른 집도 다 마찬가지예요."
"어머, 선생님, 놔두세요. 오늘은 아이들 보내고 운동 다녀오고 아이 친구 엄마들과 점심까지 먹고 오느라구요. 아이아빠도 출장 중이기도 해서요. "
민망한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선생님, 미국에서 오셨다면서요? 저도 워킹비자로 미국 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여자들 그런 데 가면 고생만 하고 임금도 제때 못 받는 경우도 많다고 못 가게 해서요. 진짜 가고 싶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독박육아 중이지만요."
경선은 독박육아 낯선 발음의 단어가 흥미롭다.
"그런가요? 미국도 별거 없어요. 사는 게 다 똑같은걸요."
"근데 저는 미국은 총기사고 있어서 좀 무섭더라고요."
"저도 우리 아이들 영어 시켜서 나중에 유학 보내려고요, 제가 영어만 잘했어도 이러고 안 사는데. 외벌이에 쌍둥이라."
자신도 경선처럼 나이 들어도 일을 하고 싶다고도 했다. 두 아이의 영어 수업이 마무리된 후 화장실을 잠깐 써도 되는지를 물었다. 일을 하다 보니 생존의 일차적 욕구를 해결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는 건 어떨 수 없다. 경선은 수업을 들어가기 전에 근처 카페에 가서 화장실을 사용하고 나면 들어가면 급한 경우가 아니면 참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한다. 화장실 안은 아이들 미끄럼 방지를 하려고 나무 매트가 깔려있고 아이들 목욕할 때 쓰는 고무제품의 노란 오리들이 욕조에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세면대에 물을 틀고 변기에 앉아 오리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해졌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오리가 아니라 병아리였다. 큭, 하며 웃음이 터진다. 너도 내가 웃기니? 하고 서로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수업이 마무리 돼 갈 즈음 치수에게 보이스톡이 여러 차례 걸려왔다.
" 당신이 없으니 밥 챙겨 먹기가 힘들어, 난 빵 못 먹어, 밥 먹어야 되는 거 알면서."
" 아유, 미국에서 밥 없으면 안 된다니, 몇 십년을 살아도 입맛은 안 바꾸니 큰일이네요, 밥은 밥통이 하고 김치는 담가놓고 온 게 있는데 그것도 못 챙겨 먹나요?"
" 그게 아니고, 밥도 그런지만 교회 형제, 자매들이 당신 언제 오냐고 자꾸 묻는데?"
단호하게 취업비자가 만료될 때까지 더 있을 거라는 말에는 치수는 제정신이냐 라는 말과 함께 갈 때는 마음대로여도 올 때는 마음대로 어림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치수와 경선 사이에 작게나마 꺼지지 않던 사랑과 연민의 불씨는 그들의 물리적 거리만큼 이내 꺼질 것이고 끝내 차갑게 식을 것임을 짐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