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의 부모는 의사라는 메모가 남겨져있다. 이런 메모는 짧지만 유의미한 정보를 내포해 중요하게 여긴다. 회사가 강요하는 교재를 말만 잘하면 원하는 만큼 판매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주은은 네 살이지만 과목별 다양한 선생들이 그 집을 드나든다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바이올린 선생과 시간이 비슷해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다. 그래도 주은은 생각보다 에너지가 넘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에이프릴은 주은을 돌보는 필리핀 억양의 젊은 여성이다. 주은의 하루 스케줄이 숨 쉴 틈 없이 빼곡히 적힌 시간표가 냉장고 앞에 붙여져 있다. A4종이를 경선에게 내밀고 시간표를 참고하라는 눈치를 준다. 잠깐씩 관찰해 본 에이프릴은 말보다는 눈치로 말하는 듯했다.
몇 차례 주은이 수업을 다녀간 이후의 일이었다. 경선은 수업시간에 늦지 않으려 서두르다 아파트 입구 계단에서 두 개의 층계가 한 개로 보여 헛디뎌 균형을 잃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악, 소리와 함께 더리에 힘이 풀렸다. 치마를 슬쩍 들어보니 찢어진 스타킹의 시실과 날실에 피가 맺혔다. 아휴~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경선은 급하게 편의점으로 달려가 스타킹과 밴드를 샀다. 10분 늦게 수업시간에 도착했다.
“헬로, 미시즈, 조”
에이프릴은 평소와 달리 더욱 굳어 보였다. 종종거리며 뒷걸음질 쳐 부엌으로 사라졌다. 경선 앞으로 차가운 공기 기운이 서서히 다가왔다.
거실에서 한 여성이 걸어 나오며 경선의 붉은 얼굴을 살폈다. 그녀는 거실의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걸린 유명 화가들의 그림과도 잘 어울릴듯한 연분홍 피부톤이 젊음을 과시하는 듯했다.
"선생님, 저 주은이 엄마예요. 일단 수업하시고 좀 이따 뵐게요, "
"어머니, 안녕하세요, 이동하다가 조금 늦어졌는데, 연락을 못 드렸습니다."
급하게 오느라 미처 마스크를 가방에서 꺼낸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허겁지겁 마스크를 꺼내 아이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사십 분 동안 놀이 수업과 파닉스 하는 동안 경선은 어쩐지 자꾸 밖에 있을 아이의 엄마 쪽으로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이태리 소파의 감촉은 한 왕조의 풍요로웠던 영광을 떠올리게 했고, 그에 걸맞은 낯선 풍미를 발산 하는 홍차는 결국 입에 대지는 못하고 어정쩡하게 앉았다. 경선은 치마 속 무릎에서 피가 굳으며 스타킹과 엉겨 붙어 쓰려왔다.
"선생님, 지난번에 교사가 바뀐다는 말은 팀장이라는 사람에게 들었지만, 난감하네요. 저는 주은이 지난번 선생님 하고 오래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갑자기 교사가 바뀌면 아이 정서에도 좋지 않고요, 흠, 저로선 좀 난감하네요."
그녀는 곧이어 차 한 모금을 들이켜고 한숨을 흘려내며 입을 실룩거렸다. 앙다문 입모양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감을 느끼게 할 뿐이었다.
갑작스레 경선으로 교사가 교체된 것이 불만인 모양이다. 경선의 나이가 많아서인지, 단순히 아까 수업에 늦어서인지 묻지 못했다. 어쩐지 둘 다일것 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누군가로부터 부정적인 사실을 확인받는 기분은 끔찍할 수밖에 없다. 주은의 엄마가 팀장과 조만간 통화할 것에 대해 생각하자 머릿속이 뿌였다. 부엌을 정리하던 에이프릴이 흘깃거리며 애써 궁금한 눈빛으로 나와 배웅을 했지만 경선은 굳은 미소만 지었다. 경선을 쫓던 에이프릴의 표정에서 자신이 한국에 와서 아직까지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자신이 환대받지 못하는 것, 이방인이 된 기분을 읽었다.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왔을 때는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한 줌의 볕과 온기를 나누고 있었다. 경선은 편의점 안에 구석자리에 앉아 밀물처럼 밀려오는 감정을 다독였다. 내 어머니의 품에 안기듯 돌아온 한국이다. 믈론 이 정도의 상처 즈음은 처음부터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지 않냐고 어머니가 귀에다 말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