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라는 잴 수 없는 크기
내가 조금 더 어릴 때에는 나의 아픔과 타인의 아픔을 비교하는 무의미한 일을 반복했던 적이 있다. 그 땐 나의 아픔이 크면 클수록 ‘내가 너보다 더 힘들었어!’하고 자랑하듯이 내세우고 싶었던 마음도 덩달아 커졌는데 역시나 철이 없었구나, 싶다.
나의 아픔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아픔은 크기로 잴 수가 없다.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며 다독여주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내가 철없는 생각을 그만 두게 된 것은 노희경 작가의《거짓말》을 읽고 난 후였다.
영화를 보거나, 티브이를 보면, 아픈 사람보다 즐거운 사람들이 많지. 어려선 나두 세상이 그런 줄만 알았어. 그런데, 커서 보니깐, 아니드라. 집 안에 죽은 사람 하나쯤은 어느 가정에나 있고, 잘 나가는 형제가 있으면, 못 나가는 형제도 있고……. 아주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있어. 걘 고아야. 그 친구의 남편은 손을 다쳤지. 그래서 자기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을 못해. 나는? ……아주 사랑하는 동생이 죽었다, 그래서 슬프다, 내가 너보다 더 아프다, 그건 아니야.
-노희경《거짓말》8부, 동진의 대사 中.
이 대사가 처음부터 받아들여졌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이 사실을 깨닫기 까지는 참 많이 아파야했다. 그래서 ‘내가 너보다 더 아프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니, 아니까 오히려 더 반항심에 이기적인 마음이 자라났다. 그러면 나는 위로받을 자격도 없는 거냐, 남들 다 겪는 아픔 너도 똑같이 겪는 거니까 그렇게 아픈 척할 거 없다 이거냐.
동진이 말하는 아픔에 대한 생각은 이윽고 깨달음을 주었다. 누구든지 아픈 구석이 있지만 그것을 굳이 들추어내지는 않는다. 아픔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첫 째, 사람들은 딱 자기가 아팠던 만큼 이해할 수 있어서.
둘 째, 굳이 이야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셋 째, 나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서.
어떻게 보면 누군가가 아프고, 힘들다고 말할 때 사람들은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조금 더 강하게 표현하자면 ‘네가 우울증이면 나는 벌써 죽고도 남았다.’라는 심리가 작용하기도 한다. 남의 아픔보다는 나의 아픔이 앞서는 심리인 것이다.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라면 타인의 아픔도 기꺼이 감싸 안을 수 있을 텐데.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철없던 시절 나의 모습처럼 자신의 아픈 이면을 마치 무기인 양, 경험치인 양 드러내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남들보다 더 힘든 상황이니 더 많이 위로받고, 관심 받아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자신의 아픈 기억을 마치 경쟁하듯이 들추어내는 경우도 있다.
‘겨우 그 정도로 힘들다고 해?
나는 이런 상황까지 겪어 본 사람이야!’
그런데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그 결말은 어떻게 될까? 그러고 나면 심리적으로나마 해소되는 부분이 있는 걸까? 나는 이런 부류의 경쟁이 아주 무의미하다고 본다. 누가 더 힘들게 살았냐, 더 큰 아픔을 겪었냐를 가지고 경쟁 심리를 느끼는 것부터가 굉장히 무의미한 일이다.
사람마다 겪는 아픔과 고통은 저마다 다르다. 더군다나 그 크기는 잴 수도 없고, 비교할 수도 없다. 그런 것을 가지고 서로 견주려고 한다는 것이 얼마나 미련스러운 일인가!
정말 마음이 많이 아픈 사람은 정작 그런 마음을 내세울 수조차 없다는 것을 아는지. 무기력하고, 무의미하고……. 그것이 매일같이 반복된다는 걸.
어느 날에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책이든, TV에서든 어떤 인물을 대하면서 ‘그 사람은 그런 일도 견뎌내었는데 나는 고작 이런 일로 힘들어하다니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조차도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런 생각도 타인의 아픔과 나의 아픔을 비교하는 일의 일종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보다 조금 더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다고 생각하면 나의 아픔이 조금은 줄어드는 것 같다고 느끼는 격이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그 사람의 감정과 경험 그대로를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사람의 상황이 나보다 더 힘들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의지를 본받고, 그 사람의 감정에서 공감하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아픔은 앞세우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아픈 구석을 잘 드러내지 않는 진정한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한 마디로 ‘자랑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냥 부끄러운 일로 치부할 수도 없겠지만 자랑하듯 떠벌리고 다닐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힘이 들고, 마음이 아프지만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노라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사실은, 눈물겹다. 밝은 모습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모습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눈이 부시다. 누구든 행복하고, 평탄한 때가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기 마련이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불행’이라는 이름에 도리어 ‘가르침’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겸허히 받아들이게 되는 것. 몸서리치게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온 몸으로 ‘불행’을 느낀다. 그렇게 ‘불행’을 받아들이고, 대하는 방법을 터득해간다. 오히려 나에게 주어진 ‘불행’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겠다고 생각한다. 이대로 무릎 꿇을 수는 없다고 다짐한다. ‘불행’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겪어낸 사람들은 알고 있지 않을까? 그것을 자연히 받아들이고, 이겨내고 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전보다 훨씬 더 강하고, 현명해진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는 것을. ‘불행’속에 휘말리지 말자. 그 안에서 ‘화’라는 감정에 잡아먹히지 말자.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훨씬 더 강하고, 현명하다. 그래서 나 자신을 믿어야한다.
주변을 돌아보면 행복하고,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 사람들도 그들만의 아픈 구석이 있을 것이다. 웃고 싶지 않아도 웃어야만 하는 사람이 있고, 실은 마음속으로 ‘화’를 삭히고 있을 지도 모른다. 자세히 들여다보아야만 보이는 것이 있기에, 누군가의 행복이 꼭 그 사람의 전부라고만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거짓말》속 동진의 대사를 곱씹어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