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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꿈 Sep 30. 2018

나의 작은 사회

더 큰 사회생활을 위한 밑거름 다지기

 하나의 교실은 작은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교사는 그 작은 사회 속에서 어린 구성원들과 함께 규칙을 세우고 지켜나간다. 아이들은 매일같이 도전하고, 여러 가지의 것들을 시도해본다. 최대한 아이들은 스스로 경험하며 몸소 느껴보려고 한다.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성격이 존재한다. 그래서 여러 가지 성격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익혀나가게 된다. 교사는 아이들이 그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갈 수 있도록 곁에서 지원하고 격려해주는 징검다리와 같은 역할을 해 준다. 그러나 나도 사람인지라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해 볼 기회를 박탈한 채, 무작정 지시하는 투로 말하는 때가 많아지는 것 같아 그것 또한 반성해볼 일이다.

 교실 안에서는 질서가 있어야 하고, 지켜야 할 순서가 있다. 무언가에 대한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터득해 나가는 과정에서 어떠한 ‘기준’이 필요하다. 너무도 사소한 일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아이들이 스스로 깨닫는 깊이가 달라질 수 있다. 자신이 어질러놓은 장난감을 스스로 정리하는 것, 음식을 먹다가 흘리면 스스로 닦아보는 것 등 사소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이들은 그 속에서 ‘책임감’을 배운다.


 내가 만나는 아이들은 영유아시기로, 상대적으로 개인차가 큰 시기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어우러질 수 있도록 교사의 센스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 글자나 숫자, 혹은 특정한 것에 자신감이 있는 아이들은 그것을 다른 친구들에게 알려주며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준다. 내가 잘 하는 것이 있다면 작은 선생님 역할을 경험해보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알아가고, 도와주는 것에 기쁨을 느낀다. 일명 ‘재능기부’와도 같은 것이다.


 아이들이 겪는 갈등상황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대부분 ‘말을 잘 하는 아이’가 이기곤 한다. 말 잘하는 아이를 이기지 못하는 아이는 자연히 손이나 발이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네 사회가 그렇듯 어떤 경우에든 신체적인 힘의 행사는 정당화될 수 없다. 꽤나 단순한 일이지만 어린 아이 시절부터 말로 해결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내가 불편해.”

“미안해, 내가 모르고 그랬어.”

“괜찮아.”

“선생님, 도와주세요.”

“다 쓰고 빌려줄게.”


 영아기의 아이들은 무언가를 가르치기보다는 말 그대로 보살펴주기를 한다. 그런데 그 작은 아기들도 힘의 원리를 알고, 눈치가 있는 걸 보면 매번 신기하다. 교사들 중에서도 누가 위고 아래인지를 알아차리니 말이다. (어린 아기들도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교사의 말을 잘 듣는다. 교사의 경력에 따른 유능함의 차이일 수도 있지만 아기들의 놀라운 눈치일 수도 있다고 감히 생각해본다.) 상하관계가 아니더라도 아이들은 자신에게 엄하게 대할 수 있는 어른과 아닌 어른을 구분해낸다. 0세반 아기가 친구에게 물건을 건네어주고 받으라는 듯 시늉하는 것만 보아도 아기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사회성이 길러지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를 배우고, 선생님을 배우고, 친구를 배운다. 친구와 함께 노는 것에 익숙해진다. 아이가 커갈수록 친구관계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유아기가 되면 위와 같은 갈등상황이 자주 벌어지게 된다. 어떤 아이들은 교묘하게 꾀를 부리기도 하고, 친구들 앞에 군림하려고 하기도 한다. 밖에서는 작고 어린 아이들이지만 교실에서는 그런 아이들도 제 각각의 모습과 본성을 드러내는 걸 보면 그것 또한 놀랍다. 어쩌면 우리의 가장 순수한 본성, 있는 그대로의 모습들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말처럼 아이들은 아이들일 뿐인 것이다. 좋은 감정, 나쁜 감정 그 감정 그대로를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해낸다.

 이런 작은 사회 속에서 여러 명의 아이들과 한 해, 한 해를 보내다보면 회의감도 참 많이 든다. 아이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만 해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 나는 그들의 부모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만큼의 선, 딱 그 선까지만 지키려고 한다. 나머지는 온전히 부모님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한 아이의 초등학교 시절,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 시절, 그리고 다 큰 어른이 된 모습까지 모든 것이 궁금하지만 나의 몫은 길어야 7살, 딱 거기까지이다.


 아이들의 기억 속에서 나는 점차 잊혀져가겠지만 그래도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마음 속 어딘가 자리 잡을 튼튼한 뿌리로 남아있으리라 믿는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언제,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 때마다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자기중심을 바로 잡을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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