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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꿈 Nov 27. 2018

‘부모’라는 이름

그 이름에 정답은 없다

 학교를 졸업하고 현장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부모의 올바른 양육태도라든지, 영유아들과의 적절한 상호작용, 쉽게 말해 ‘어른들의 잘못을 꼬집어내는 일’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여러 학자들의 연구와 논문, 교육 방송에서는 아이를 양육하는 데에 있어서 어떠한 ‘정답’에 가까운 부모로서의 태도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학생 시절, 초임 교사 시절까지만 해도 그것만이 꼭 정답이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여러 가지 한계가 많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고,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만큼 다양한 부모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부터 ‘부모가 되어야지.’하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어느 순간 아이가 태어나고, 그 순간부터 부모라는 이름으로 한 가정을 꾸리게 되는 것이다. 한 광고에서는 아이의 1살, 엄마도 1살이라고 말한다.

 대학 시절에 전공 공부를 하면서는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고, 부모로서의 양육태도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옳고 그름을 가리는데 더 신경이 갔던 반면에, 교사로 현장에서 일하다보니 그 시각이 조금은 달라졌다. 학자들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여러 논문과 교육방송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데 어떤 ‘정답’에 가까운 부모로서의 태도가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한계가 있는 경우가 참 많다는 걸…
 또 결국에는 그것이 모든 아이들에게 ‘정답’처럼 꼭 어울릴 수는 없다는 걸…
 표로 나누듯이 아이들은 그렇게 쉽게 분류될 수 없다는 걸… 차차 깨우쳐 나가고 있다.
 진짜 아이를 낳고 길러보는 입장과, 나처럼 교사로서 아이들을 대하는 입장의 차이가 크다는 것도. 부모님들께 꼭 교사로서 ‘정답’에 가까운 말만을 해야 할까…?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서도 충분한 이해가 필요한 것 같다. 그 속에서 아이들이 잘 자라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 같다.
 참 어려운 일이다..!
-2015.08.

 만일 내가 엄마라면, 하고 생각하는 것은 거의 일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직업 특성상 그런 생각은 자연히 들 수밖에 없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결혼조차 하지 않은 나이 어린 교사가 ‘엄마’의 마음을 모두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매일같이 아이의 손을 잡고 교실을 오가는 부모님들을 대하는 것이 너무도 익숙한 일이지만 아침마다 아이를 씻기고, 입히고, 먹이며 시간을 보냈으리라 생각해보면 참 대단한 분들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부모’라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 모든 어른들이 위대한 것 같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여러 번 고민해본다. 나의 작고 예쁜 아이가 작은 생채기라도 나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이해해보기도 한다. 한 동안 미래에 태어날 나의 아이에게 편지를 적어보기도 했다. 어찌 보면 오버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편지를 여러 번에 걸쳐 적어보면서 자연스럽게 아이에 대한 마음, 엄마가 되었을 때의 마음가짐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재 나의 모습이 훗날 내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내가 엄마라면 내 아이에게 당연히 당당하고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 것 같았고, 아이 친구들에게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면 좋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들을 내 아이에게 자연히 알려주고 싶고, 내 아이를 기르는 일이라면 조금 더 깊이 있게 공부하면서 조금이라도 나은 엄마가 되도록 노력할 것 같았다.

나는 내 아이에게 따뜻한 마음씨를 물려주고 싶지만 때로는 냉철할 줄도 아는 현명함을 가르치고 싶다. 세상에는 좋고 아름다운 것들만 가득한 게 아니니까.
-2017.01.

 어릴 적 나는 소심하고, 내성적이고, 세상 모든 것은 다 좋은 것들로 가득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받고, 눈물이 참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감수성이 풍부한 것과는 다르게 겁이 많았던 쪽에 더 가까웠다. 어른들에게 조금만 큰 소리를 들어도 눈물이 흘렀을 정도이니 말이다. 많이 위축되어 있기도 했고, 힘든 일이든 즐거운 일이든 입 밖에 꺼내는 일이 드물었다. 누군가의 세상살이가 그러하듯 세상 모든 일들은 내가 바라던 대로 이루어지는 법이 없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지도 않거니와 예상 밖의 시나리오가 한순간에 펼쳐지기도 한다. 세상에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고, 그 일이 꼭 남의 일만은 아니라는 걸 알아야했다. 내가 어릴 적부터 조금만 더 단단했다면, 조금만 더 유쾌한 성격이었다면 어땠을까.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은 없다지만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나는 어쩐지 부끄러움부터 앞서게 된다.


 세상을 보는 눈은 따뜻해야하고, 적어도 ‘나’와 ‘나의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냉철한 머리를 가져야한다. 지금 이 순간까지는 내 아이에게 그러한 것들을 심어주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에 무슨 일로든지 상처받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그 상처를 딛고 씩씩하게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주고 싶다.


 이렇게 엄마의 마음을 읽어내려가다보면 교사로서 가장 화가 나는 일이 생긴다. 부모가 아이에게 너무도 무심할 때, 다시 말해 ‘무책임’할 때이다. 그것은 아이를 양육하는 데에 있어 가질 수 있는 ‘여유’랑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부모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어린 아이는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어른들이 저지르는 잘못의 깊이를 따라갈 수 없다. 부모라면 적어도 아이의 발달 과업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기울이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끊임없이 묻고 답하기를 반복해야 한다. 하지만 매일같이 같은 옷을 입혀 보내거나 아이를 씻기지도 않은 채 무조건 기관에 맡겨두기만 하는 부모님들이 있어 충격을 금할 수가 없었다. 최대한 아이를 늦게 데려가려고 하는 사람, 아이가 갖고 있는 문제를 외면해버리는 사람, 아이를 돌볼 자신이 없다고 호소하는 사람, 무작정 약봉투만 쥐어주고 가 버리는 사람…. 그런 아이들이 안쓰럽지만 해줄 수 있는 부분은 분명 한계가 있다. 간혹 어린 아이를 두고 집을 나가버리는 부모님들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한 개인의 삶의 가치가 이전보다 강해진 시대이기도 하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싶다가도 어떻게 학교도 안 간 어린 아이를 놓고 갈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정말 ‘부모’라는 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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