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줄 알았다”라는 말
내가 어린 시절에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은 “그럴 줄 알았다.”이다. 마치 내가 그렇게 될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 전지전능한 듯 이야기하는 것이 무척이나 싫었다. 그래서 ‘예측 가능한 당연한 결과’와는 반대의 결과가 나오도록 애썼다. “그럴 줄 알았다.”라는 말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닌 부정적인 의미가 섞여 있기 때문에 자연히 반대의 결과,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도록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좋게 평가할 수 있겠지만,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여러 가지로 시도해 볼 권리를 박탈시킨 것과 같다. 충분히 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을 무시해버리는 것과 같다. 당연히 마음의 상처가 남을 수밖에 없다.
나는 종종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고, 스스로 판단하며 시행착오를 거칠 즈음에는 너무 어른들의 말에 “네, 네.”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른들이 주장하는 이런 논리가 참 싫다.
“다 내가 겪어봐서 그래.”
그들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가 다르고, 우리의 시대와 아이들의 시대는 또 다르다. 당신이 그랬다고 해서 아이들도 그러할 것이라고 판단해버리는 것이 싫다. 그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어른들의 모든 말들이 옳은 것은 아니다. 또 어른다운 어른이 있고, 그렇지 않은 어른이 있다. 그런 것을 잘 구분하는 혜안도 필요하다.
내가 4년 가까이 보육교사로 일하면서 드는 가장 큰 회의감은 이것이다. 사실상 아이들은 ‘자율’보다는 부모들의 요구에 의해, 시설의 운영을 원활히 하기 위해, 기타 여러 가지 외부적인 조건들에 의해 어른들의 기준에 맞춰지고 있다. 열심히 율동을 연습하고, 누군가에게는 겁이 나는 무대에 반드시 서야만 하고,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어야 하고, 사진 찍느라 바쁜 선생님과는 궁금한 점에 대해 이야기 나눌 시간이 줄어든다.
‘나’는 괜찮지만 ‘엄마’가 괜찮지 않다.
‘나’는 괜찮지만 ‘선생님’이 괜찮지 않다.
무심코 뱉은 말이지만 어른들 사이에 예민한 문제가 된다. 아이들은 점점 눈치가 늘어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항상 마음 한 편으로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앞으로 더 강인하고 똑똑한 선생님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의 활동을 제공해 주었을 때 누군가라도 다치게 된다면 그 활동을 다시 시행하기에는 아무래도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아이들은 즐거워하지만 어른들에게는 불안의 요소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조심하지 못해서 그렇다, 친구를 밀면 안 된다, 친구 얼굴에 손을 대면 안 된다, 등의 “안 된다. 안 된다.”를 무척 반복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아이들을 눈치 보게 만드는 상황이 펼쳐질 때마다 자연히 미안해질 수밖에 없다. 때로는 나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그런 상황들 속에서 아이들에게 더욱 짙은 미안함이 남게 된다. 무엇이든지 항상 ‘안전’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더 맑은 공기를 쐬고, 마음껏 뛰어 놀고, 무엇이든 시도해볼 수 있는 아이들의 당연한 권리를 어쩌면 우리 어른들이 박탈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꼭 안전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외부에서 평가를 받아야하는 경우가 생기면 아이들은 훈련의 과정과도 비슷한 교육을 받게 된다. 마치 가족들에게 보여줄 발표회를 준비하는 것처럼 말이다. 맨 처음 평가를 받게 되었을 때 조금 놀랐던 것은 아이들의 자율을 그토록 중요시하고, 언급하였던 것에 비해 그 평가 요소는 너무나도 아이들을 옥죄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말이 있었고, 아이들의 반응에 대해 교사가 반드시 취해야 할 몇 가지의 행동들이 정해져있었다.
지금까지도 아이러니한 것은 이미 몇 개월을 거쳐 오는 동안에 한 교실의 교사와 유아들은 그들만의 비언어적 요소로도 충분히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간단한 언어적 표현만으로도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것인지 그들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약속되어진 것이 아닐까? 어떻게 각자마다 다른 성향의 교사와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 몇 가지의 행동과 몇 마디의 말로 평가할 수가 있을까? 그리고 그 하루만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런 것들을 점수화해서 보여준다지만 그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연 그 객관성과 타당성이 어느 정도인가 고민해보게 된다. 냉정하게 말해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점수만을 볼 뿐 그렇게까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내가 교사로서 커다란 의구심이 드는 부분일 뿐이다.
교사는 아이의 과거를 만들어주는
사람이다.
대학 시절 특수아동교육 시간에 교수님이 늘 하시던 말씀이었다. 지금도 공감이 되고, 참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 시절 나의 유치원 선생님이 생각나곤 한다. 아마 사진첩에 남겨져 있어서 되새겨보기를 반복하다보니 그 기억들이 어렴풋이 남아있게 된 것 같다. 7살 때 나의 성격이 어떠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발표 자료를 어머니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덕에 친구들 앞에서 ‘가을에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발표를 했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의 옆에 서서 감과 밤, 허수아비, 참새와 같은 것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조곤조곤 발표했던 것 같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발표를 해보겠냐고 하셨고, 그렇게 유치원 졸업식 날 대표로 나가 발표문을 낭송하기도 했다.
이 밖에 어렴풋이 남은 나의 기억들은 유치원 선생님과 같은 반 아이들이 함께 만든 과거의 일부분인 것이다. 그런 작은 기억들이 나에게는 자신감의 일부가 되었는지도 모르고, 떠올리면 좋은 추억으로 남은 것인지도 모른다. 교수님의 말씀처럼 나 또한 지금 만나는 아이들에게 과거를 심어주는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아이들이 어떤 장면을 얼마나 기억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애정어리고, 마음을 많이 기울여주었던 선생님으로 남는다면 참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