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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꿈 Dec 03. 2018

실수해 볼 기회

위태로운 외나무다리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예기치 못한 여러 가지 상황들을 맞닥뜨리게 될 때마다 우리는 이런 시도를 해 보기도 하고, 저런 시도를 해 보기도 하면서 필연적인 시험의 관문을 여러 번 통과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의도치 않게 ‘실수’를 저지르게 되기도 한다. 행동으로 직접 옮기고 나서야 비로소 벌어진 결과를 보며 ‘아, 이렇게 되는 거구나.’하고 깨닫는 것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실수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실수를 하면 잘못될까봐 겁이 나서 그렇다. 하지만 아이들은 부딪히고, 넘어지고, 여러 가지 실수를 하면서 더 단단해지고 크게 성장한다. 지금 실수해보아야 나중에 더 큰 실수를 하지 않는다.
-2017.12.    

 아이들은 수 천, 수 만 번의 실수를 하면서 배우고, 깨닫는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사실 아이들의 실수는 겁이 난다. 늘 좋은 것만 가까이 했으면 좋겠고, 아픈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아이들은 아이들만의 삶이 있다. 그 사실을 존중해야하는데 그것이 참 쉽지 않은 일이다. 당장 우리 반 아이들이 같은 실수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 걸 보고 있기만 해도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언제쯤 훌쩍 커서 깨닫게 될는지 한숨이 푹 쉬어질 때도 있다. 그래도 1년을 보내고 나면 그 해의 앨범을 제작하게 되는데 그 때마다 아이들이 이만큼 자랐구나, 느끼게 된다. 매일 함께 있어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놀라운 성장속도를 그 때 제일 실감하게 된다. 3월 달 아이들의 사진을 보면 얼마나 아기 같아 보이는지 모른다. 걷지 못했던 아이가 걷기 시작하고, 옹알이를 하던 아이가 말문을 트기 시작하고, 기저귀를 떼고,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곧잘 쓰고, 곧 학교에 입학하는 걸 보면 아이들의 성장은 매번 놀랍다.


 사춘기 시절에는 가출이란 걸 해본 적이 없었던 나는 스무 살이 되어 하루 동안 핸드폰도, 지갑도 집 안에 둔 채 가출을 했던 적이 있다. 늦은 밤에 귀가한 나를 다그치는 아버지의 모습에 도리어 내가 화가 나 그 길로 집밖을 나왔던 것이다. 무작정 학교까지 걷기 시작했고, 밤을 꼬박 새서 학교에 도착했다. 하루 동안 학교에 있다가 저녁이 되어 집에 들어갔다. 그렇게 하루 잠깐 가출해 있는 동안 나의 아버지는 쉽게 잠에 들지 못했을 터였다. 엄마는 너가 그렇게 나가고 나서 아빠가 한숨 잠도 못 자고 거실에 앉아있었다며 나를 다그치셨다. 철이 없던 나의 실수였던 것이다. 그런 나의 실수들은 도리어 나를 반성하게 만들었고, 그러는 동안 부모님께서는“그럴 줄 알았다.”라는 태도에서 점차 노력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조금씩 인정해주시기 시작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취직을 하고난 어느 순간부터는 자연히 알아서 하겠거니, 믿어주시는 것 같기도 하다. 사회초년생일 때 한 동안은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서운하기도 했다. 너무 나를 내버려두다시피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모님 말씀대로 나는 엄연히 성인이었고, 스스로를 충분히 책임질 나이였다. 부모님의 손을 점차 떠나기 시작하면서 일탈된 행동은 스스로 하지 않아야 했고, 더 이상 철부지 학생의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날은 아버지가 “이제 우리 딸도 철이 좀 드는구나.”하고 흐뭇하게 이야기하시기도 했는데, 글쎄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아직도 한참 어린 것 같고, 한참 배울 게 많은 것만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실수를 거듭하면서 성장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실수를 거듭하며 자라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내가 일탈된 행동을 하고, 그렇게 실수를 반복할 때 부모님의 마음을 어떠했을까? 어쩌면 가장 듣기 싫었던 “그럴 줄 알았다.”라는 말은 내가 눈에 뻔히 보이는 위태로운 외나무다리를 홀로 건너가려고 할 때,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야하는 부모님의 심정을 반영한 말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아이들을 볼 때의 그 심정과 같으리라 생각하면 그 심정이 충분히 짐작이 가게 된다. 아이들이 무언가 시도할 때 나는 그 결과를 당연히 알고 있지만, 아이들은 직접 몸을 부딪치고 눈으로 확인해야만 한다. 간단한 예로, 블록을 자신의 키보다 2배는 더 높게 쌓아보려고 하지만 결국엔 무너지고 만다. 그 높이를 견뎌내기엔 아이들의 팔이 쉽게 닿지도 않고, 무언가를 밟고 올라서려하면 “위험해.”라는 말이 곧장 들려오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끊임없이 쌓고 무너뜨리기를 반복한다. 더 높게, 더 크게 쌓으려고 한다. 아이들의 그런 심리는 커가면서 계속될 것이고, 점점 더 복잡한 형태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내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직접 부딪쳐보고 느끼며 깨달아가기를 원할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눈에 뻔히 보이는 외나무다리를 위태롭게 건너보려고 할 것이다.


 이런 아이들 앞에 어른들은 정말, 겁쟁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는 실수해볼 기회를 충분히 주어야한다. 그래야 아이들도 그 만큼 성장하기 때문이다. 충분히 기다려주고, 지켜봐 주어야한다. 아마 아이들도 정말로 위태로운 순간에는 자연히 도움의 손길을 뻗게 될 것이다. 일탈을 넘어선 탈선이 아니길, 아이들이 곧 제자리로 돌아오길 나는 믿고 싶다. 불안한 마음을 움켜쥐면서도 ‘믿음’을 지키고 싶은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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