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무기력에서 나를 일으켜준 것
2017년 초반만 해도 관객 서른 분 정도 모시고 조촐한 단독 공연이나마 겨우 할 수 있었던 인지도 없는 밴드 DUSKY80이 앨범도 몇 개 더 발매하고, 조금 더 세상에 알려지게 된 이후 처음 100석짜리 극장에서 시도하는 나름 의미가 큰 공연이었다.
공연 준비 자체는 꽤 성공적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공연을 보고 싶어 했다. 티켓은 금방 매진되었고, 이 음악 씬에서 꽤나 알려진 유명한 뮤지션들의 관심도 받았다. 하지만 밴드 일을 하는 내내 나는 혼자인 것처럼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여느 때처럼 모든 것을 혼자 준비해야 했던 연말 콘서트는 겉으로는 나름 잘 준비되어가는 듯 보였지만 내 마음은 그동안 있었던 멤버들과의 갈등으로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이 공연이 어쩌면 내게는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공연 전날 밤까지 며칠 밤을 꼬박 새워 가며 내 몸과 마음을 갈아 넣다시피 준비했다.
그 와중에도 내 마음은 아무도 모르게 계속해서 곪아가고 있었다.
밴드를 하기 전까지, 나는 <우울>이라는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밝은 편이었다. 늘 하고 싶은 것을 했고, 대체로 어디에서나 사랑받는 축에 속했으며, 약간 아쉬웠지만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어느 정도 할 만큼의 돈도 벌었다.
하지만 밴드 활동을 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우울증>이라는 것에 시달렸다. 어떤 체계나 명확한 약속도, 자질구레한 일들을 대신해줄 소속사 같은 것도 없던 밴드 활동 초창기에는 해야 할 일이 생긴다거나 어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아무도 먼저 나서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늘 리더인 내가 혼자 모두 감당해야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초창기에는 팀의 체계가 명확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어떤 역할도 주어지지 않은 멤버들을 대신해 혼자 고생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고도 고맙다 소리 한 번 듣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상황이 어떤지 이해하기 어려운 미숙함 때문에 그러려니 치부해 보았지만 그래도 야속한 마음만은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멤버들은 불만을 이야기하는 것에 서툴렀고 평소에는 불편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내가 말을 꺼내지 않는 한 굳이 아무도 불편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려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종종 공연을 앞두고 다들 예민한 상태로 대기실에서 가끔 터져 나오는 멤버들의 감정 섞인 불만을 듣다 보면 '싸워서 이 공연을 망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 정작 턱 끝까지 차오른 내 불만은 꾹꾹 쌓아두기 일수였다.
그렇게 나의 곪아버린 마음을 담보로 연말 콘서트까지 꾸역꾸역 오게 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 공연은 나름 성공적으로 끝이 났지만.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작은 영광의 이면에는 내 마음은 내팽겨 둔 채 언제나 홀로 고독하게 일해야 했던 나의 어둠이 깔려 있었다.
콘서트가 끝난 2018년 1월, 거의 한 달 동안 나는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먹고 자고를 반복하며 폐인 같은 삶을 억지로 살아내다 보니 어느새 2월이었다. 막연하게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을 때쯤 생각 없이 내려보던 SNS에 올라온 글 하나를 보게 되었다. <집시 재즈 기타리스트 'Denis Chang'의 일본 도쿄 워크숍!>
눈이 번쩍 뜨였다. 나름 한국에서 '집시' 음악을 한다고 하는 밴드 DUSKY80 이라지만 그 밴드의 리더인 나는 한 번도 집시 연주를 직접 보거나 배운 적이 없었다. 이 열등감을 채워줄, 내가 진짜로 해보고 싶은 무언가를 발견한 순간 나는 마치 완치된 환자처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풍성한 연말 콘서트를 진행하느라 통장 잔고는 내 여행을 허락하지 않을 기세였지만 머릿속은 벌써 온통 <도쿄>, 그리고 <집시>로 가득 차있었다. 정신을 차린 나는 이미 비행기 티켓을 결제하고 있었다. 지금 내게 도쿄로 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망가져 있던 나의 몸과 마음을 일으키는 놀라운 힘.
그것은 다름 아닌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