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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윤슬 Sep 28. 2022

어느 맑은 날 약속이 취소되는 기쁨에 대하여

하나로도 괜찮은 모듈형 인간들을 위하여



육아용품 박람회 가판대에 좀 특이하게 생긴 장난감 자동차가 올려져 있습니다. 자세히 봐야 알 수 있는 작은 고리가 앞뒤에 붙어 있죠. 하나만 있으면 평범한 자동차지만 고리를 이용해 여러 대를 연결하면 기차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박람회를 찾은 사람들은 장난감의 아이디어에 관심을 보이지만 막상 구입할 땐 하나만 샀습니다. 여러 개가 아니면 아무 특징 없는 장난감인데 말입니. 판매량에 인센티브가 걸려있던 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사람들을 유혹하지만 하나 이상을 구입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만 필요하면 아무 기능 없는 저렴한 자동차를 사면 될 텐데 왜 굳이 연결 기능이 있는 자동차를 살까? 저조한 판매량에 기운이 빠져 하소연하던 하현 작가님과 같이 일하는 언니 사이로 사장님이 불쑥 끼어듭니다.


"나중에 마음이 바뀌면 몇 개 더 사서 연결할 수 있잖아. 사람들은 그 가능성을 좋아하는 거야."






친구도 좋고 피자도 좋고 노래방도 좋지만, 친구와 피자를 먹고 노래방에 가기로 한 약속이 취소되는 더 좋습니다. 외톨이가 되고 싶은 건 아니지만 혼자 있는 시간은 언제나 콤합니다.


가족이라는 공간 곳곳에 배어있는 소리를  피해 호텔에서 고요를 즐기고, 빼놓지 않고 <세계테마기행>을 챙겨보면서도 내가 떠나는 여행은 어째 부담스러운 이곳은, 고리가 달린 장난감처럼 연결 기능은 있지만 하나로도 괜찮은 모듈형 인간이 사는 세계입니다.






부유하고 명랑한 독거노인이 장래희망하현 작가님은 창밖은 푸르고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어느 맑은 날에 약속이 취소되는 기쁨을 소개합니다. 선물처럼 주어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금  돈 값이 나가는 호텔을 빌려야 얻을 수 있는 완전한 고요가, 고양이 한 마리면 충분한 싱글라이프가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지를요.


지구 반대편 사람들이 거대한 호박 배로 경주하는 장면을 보면서도, 낮잠 자다 꾼 엉뚱한 꿈 이야기를 엄마와 나누면서도, 냉동실에서 꺼낸 인절미가 녹는 시간을 안달 내면서도 행복은 넉넉하게 수확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내는 멋진 순간에 감탄하고 마는 SNS와 달리 <어느 맑은 날 약속이 취소되는 기쁨에 대하여>를 읽고 있으면 소홀하게 대했던 '내' 행복을 살피게 됩니다. 마음에 쏙 들게 커트해주는 미용실이, 일주일에 한 번은 찾게 되는 제육볶음 집이, 노력에 응답해주는 체중계 숫자가 선사하는 기쁨들을 돌아보면 어느새 행복의 볼륨이 조금 더 높아졌다는 걸 깨닫게 되죠.


쉽고 편하게 취하지 못하므로 특별한 날들이 가치 있다고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씩 찾아오는 그런 순간을 위해 지금 당장 누릴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을 돌보지 않는 삶은 서운하고 애꿎어요.

산책하고 사색하고 먹고 놀고, 무엇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주는 기쁨을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어느 맑은 날 오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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