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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윤슬 Aug 09. 2022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완결)

로버트 카파





배수비오 화산이 무심히 연기를 내뿜고 있는 이탈리아 연안 작은 마을. 맞은편 산허리에 숨어 마을을 내려다보는 남자가 있습니다. 지붕도 없는 곳에서 밤을 보낸 탓인지 몸이 삐걱댑니다. 요새를 벗어나 덤불 속에 숨어 있는 처지가 딱하지만, 좋은 사진을 건지기만 한다면 새로 고용된 회사에 지금보다 높은 봉급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따사로운 태양이 떠오를수록 몸은 차갑게 굳습니다. 어둠이 걷힌다는  그곳이 불구덩이로 변할 시간이 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배수비오 화산이 뿜는 연기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간밤에 벗어난 슈스터 요새가, 마음껏 담배를 피워도 되는 그 우중충한 벽이 그리워집니다.

산 아래에 있는 평원과 포도밭이 햇살을 받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농가들 창문 하나하나가 선명히 모습을 드러내자 저쪽에서도 이쪽이 훤히 보이리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칩니다. 남자는 덤불 속으로 몸을 낮추고 포격이 쏟아질 반경을 가늠합니다.

최초의 포탄이 마을 한복판에 떨어집니다. 포탄이 남긴 연기를 기점으로 박격포와 순양함에서 발사한 포탄 수백 발이 따라붙습니다.

남자는 지면으로부터 겨우 10센티 정도만 고개를 들고 셔터를 눌러대지만 만족스러운 사진은 찍히지 않습니다. 마을에서 피어오른 연기와 화산이 뿜어내는 연기가 경쟁하듯 치솟아 오릅니다.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포탄이 날아듭니다. 남자는 덤불 깊숙이 머리를 파묻고 포탄이 자기 주위에 떨어지지 않기만을 기도합니다.





로버트 카파 Robert Capa  



시대 상황과 타고난 기질, 생적 약점과 뛰어난 재능은 카파의 삶을 입체적으로 구성했습니다. 그는 험을 주저하지 않는 과감한 성격을 가졌지만, 압적으로 구는 형사에게 항의 한마디 못하는 소심함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카파이즘'이라는 문구를 탄생시킨 명성 사진 조작 논란 역시 모두 그의 소유입니다. 공포에 굴복해 전장을 벗어난 범인凡人이었지만 그 과정을 모조리 기록으로 남긴 타고난 기자이기도 했습니다. 가장 위험한 전장만 고집하는 강인한 의지와 술이 없으면 동력을 잃는 나약한 정신 또한 모두 그가 지닌 특징입니다.

이렇게 복잡한 형태를 가진 인물이 전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요.



라이프치히에서 맞은 첫날밤, 우리는 일찍 잠을 청했다. 한창 자고 있는데, 고참 기자들 가운데 체력이 좋기로 정평이 난 할 보일이 우리를 깨우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어니 파일이 죽었대."
 그날 어니 파일은 우리로부터 아득히 떨어진 이에시마에서 사살됐다. 잠에서 깬 우리는 모두 할 말을 잊은 채 우두커니 앉아서 술만 마셨다. 290p



탄환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오른쪽에 있던 병사 팔이 찢어지고 왼편에 있던 병사 죽어갈 때 카파를 구 정확한 판단이나 과감한 행동이 아니라 그저 운이었습니다. 수비오 화산 맞은편에 숨어있을 때 독일군 포탄이 그에게서 백여 미터 근처로 빗나간 일 역시 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노르망디에서 도망칠 때 몸을 싣던 상륙정 선교가 포격에 날아갔음에도 간발의 차로 무사했던  역시 운입니다. 애매한 진영에서 마주친 아군 병사들이 목에 걸린 독일제 카메라를 봤음에도 멀리서 쏴버리지 않고 생포하기로 마음먹은 상황 역시 운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동시대에 활동하던 종군기자 '어니 파일'이 적국인 일본에서 죽어갈 때 마찬가지로 적국 독일에 있던 카파가 살아남은  운에 의한 결과입니다.

전쟁은 룰 없는 링에 사람을 던져 놓고 총을 갈겨댑니다. 살아남기 위한 자격을 충족했다는 말은 전장에선 성립되지 않습니다. 훈련이나 계획, 작전만으론 생존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병사들이 죽을 때 함께 몸을 숨겼던 비전투병 카파가 살아남은 사실로 차갑게 증명됩니다.

카파가 찍은 사진이 우리에게 전해진 건 기적 같은 운이 겹쳐져 생긴 결과입니다. 그리고 전장에서 그의 목숨을 건진  운이었다면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를 얻은  인류사의 운이겠지요. 하지만 전쟁이 반복된다면 카파 뿐 아니라 인류 역시 끝없는 동전 던지기를 해야 합니다. 앞면이 나오면 역사를 이어갈 수 있지만 뒷면이 나오면 멸망으로 향해야 하죠. 로버트 카파가 지뢰에 의한 폭사로 최후를 맞았다는 사실은 참담한 교훈입니다.


전쟁을 반복하고도 살아남은 사실이 운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닫지 못하면 인류 역시 생각지도 못한 시점에 최후를 맞이하겠지요. 로버트 카파에게 그러했듯이, 인류에게도 끝없는 운이 제공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종군기자의 대명사가 되어버렸지만 정작 그 자신은 종군기자가 쓸모 없어지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적어도 로버트 카파라는 이름이 종군기자로 유명해지지는 않는 세상을요.

최초로 참가한 스페인 내전 이후 줄곧 피가 낭자한 전쟁사진을 찍어온 카파는, '그러나 7년을 그렇게 살아왔음에도 살점이 찢겨나가고 피가 솟구치는 현장을 보면 심한 구역질'을 느꼈습니다. 생생한 사진위해 격전지만 골라 다녔음에도 전투가 종료되고 마을이 폐허로 변 모습을 보면 '이렇게 싸우고, 죽고, 사진을 찍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상념 빠지곤 했습니다. 어제까지 함께 포커를 치던 조종사 돌아오지 못 상황에서도 카메라를 들어야 했던 그는, 부상당한 병사가 고함을 치는 모습을 접한 뒤 '나는 나 자신과 사진기자라는 내 직업에 회의가 들었다. 장의사나 해야 할 일을 내가 한 것 같아 역겨운 생각마저 들었다'는 고백을 남깁니다. 그는 승전한 장군의 멋진 옆모습보다 이름 없이 죽어간 소년병들의 더러운 발을 더 공들여 찍는 인물이었고, 전쟁 마지막 날 허망하게 죽어버린 병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애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라이프>지의 스타 종군기자가 아닌, 할 일 없는 백수 사진가를 그리워하는 인물이었죠.

배수비오 화산 맞은편 산허리에 숨어 포탄을 피하던 남자 이야기를 마저 전하겠습니다. 삶과 죽음이 농지거리 같은 기준으로 갈라지는 곳 한가운데서도 솔직함과 유머, 서정성을 잃지 않았던 사람. 전장에 어울리지 않았던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 말입니다.



 최초의 발연포탄이 마을 한복판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박격포와 순양함과 장갑차가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지점에다가 수백 발의 포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나는 지면으로부터 겨우 10센티미터 정도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연방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지만, 같은 장면의 사진만 찍힐 뿐이었다. 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란 오직 하나, 셔터를 누를 때마다 색상이 다른 필터로 바꿔 끼우는 것밖에 없었다. 마을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하늘로 솟았다. 마을 뒤 배수비오 화산도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마치 둘이 한 형제인 양.
 내 머리 바로 위로 포탄이 날아다녔다. 박격포탄은 휘파람 소리를 내고, 순양함은 쇳소리를 내고, 장갑차는 삑삑거리는 고음을 내며 서로 불협화음을 만들고 있었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독일군 박격포도 휘익하는 소리를 내며 내게서 불과 100미터도 안 되는 언덕 위에 떨어졌다. 나는 덤불 속으로 더 낮게 머리를 파묻었다. 태양이 내 등을 비추어 따뜻한 온기가 전해왔다. 불현듯 '아! 공중을 날며 노래하는 것이 새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1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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