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1딸아이의 방과 후 뮤지컬 공개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다 같이 영화 <와일드 로봇>을 봤다. 밀린 일이 많아서 아이랑 남편이나 보라고 했는데 그냥 홀린 듯이 앉아서 야금야금 보다가 쭉 보고 줄줄 눈물을 흘렸다. T인 나를 울린 애니메이션 영화라니. 잘 만든 게 확실하거나 요즘 뭔 핑계라도 잡고 울고 싶었거나 둘 중 하나다. 제품명 '로줌 1734' 로봇이 사고로 외딴섬에 떨어져 '로즈'라는 이름을 가지고 섬 속 동물들과 부조화 속에 살아가다가 자기 집단에서 소외된 아기 비둘기를 키우게 된다. 로즈는 스스로 프로그래밍을 통제해 가면서 진짜 엄마가 되어가고 비둘기가 성장하여 떠났어도 섬에 머물며 혹독한 겨울에 섬 안의 동물들을 위해 희생하는 '와일드 로봇'이 된다. 딸아이도 처음에는 뭐가 감동적이라는 거냐며 초를 치더니 나중에는 울면서 품으로 파고들었다.
고작 8년 키웠지만 목욕, 등하교, 식사, 공부 등 대체로 자기 스스로 하는 편이니 내가 하는 건 음식을 차려주는 것과 학원 픽드롭, 학습 피드백 정도라 내 품을 많이 벗어난 느낌이다. 일찍이 스스로 해내는 것이 많았던 아이 덕분에 그나마 수험생활도 해볼 수 있었고 지금 이렇게 글도 쓰는 거지만 가끔은 내 역할이 확 줄어든 느낌이라 묘한 슬픔이 잔잔하게 깔린다. 아기 때는 빨리 커서 나 하고 싶은 것 좀 했으면 하더니 이제 좀 크니까 허무하다니 역시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다. 하여간 그렇게 낮 시간이 흘러가고 잠든 아이의 옆에서 엎드려 책을 읽을 때나 글을 쓸 때 몽글몽글하고 보드라운 아이의 손을 몇 번 잡았다 놨다 해본다. 많이 큰 것 같아도 잠든 아이를 보면 하루종일 보던 것보다 갑자기 훅 작아 보인다. 그럴 때면 낮에 깔려 있던 묘한 슬픔이 날아간다. 그렇지 않다고, 여전히 이 작은 아이는 내가 필요하다고 다시 기운 차리게 한다.
로즈가 아기 비둘기를 구하려다가 다리가 없어져서 나무로 대체하고 갖은 고생에 체내의 오일이 줄줄 빠져나가는데도 개의치 않는 모습은 분명 나를 포함한 많은 엄마들의 공감을 얻을 만하다. 로즈만큼 나도 내 몸과 영혼을 다 바쳐 키운 딸아이가 영화 속 비둘기처럼 결국 비행에 성공하고 무리 속으로 합류하여 완전히 내 품을 떠나는 날이 오면 내 마음은 얼마나 공허할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다는 말을 듣던 '미스 로봇 리'에서 엄마가 되며 점점 사랑을 알아가고 한편으로는 겪어보지 못한 다른 차원의 자괴감을 느끼며 그래도 매일 이토록 희생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운 나날들이 주욱 오버랩되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결혼하여 집을 떠난 것에 여전히 공허함을 크게 느끼며 매번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우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알아간다. 더구나 엄마에게 나는 남편이자 친구이자 자식이자 자기 세상의 전부였으니 오죽할까.
영화 <와일드 로봇>에서
불행은 다 몰려와야 불행이지 하나씩 오는 건 불행도 아니다. 남편이 여전히 이직 준비 중이라 있는 돈 까먹어가는 중인데 아이 학원 간 시간 동안 오래간만에 엄마에게 안부 전화를 해보니 많이 아프다 했다. 오른쪽 안면 경련이 심해지다가 일부 마비처럼 심각해져서 몇 년 전 뇌신경 수술을 했는데 그 반대쪽이 그때처럼 슬슬 시작이라고 했다. 전에는 너무 오래 방치하다가 수술로 갔지만 이제 경험이 있는 터라 일찌감치 병원 다니며 약 먹었지만 별 효용이 없어서 병원에서 수술 전 단계로 보톡스 치료를 했다고 했다. 보톡스는 미용 목적이기만 한 줄 알았는데 신경치료 용도로 활용되는지 처음 알았다. 이 외에도 기력도 쇠하고 감기도 오래가서 한약도 지어먹고 침도 맞고 한동안 병원에 돈을 많이 썼다는데 난 그저 듣고만 있어야 하고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한숨만 나왔다. 언제 즘 나는 이럴 때 떡하니 돈부터 입금해 주고 조금은 편하게 들을 수 있는 때가 올까.
평소에는 내가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수험생활 몇 년, 지금은 또 작가생활과 사업 도전을 하고 있는 이 오랜 세월을 후회한 적이 없는데 이럴 때면 푼돈이라도 내 월급 꼬박꼬박 나오던 기관생활로 돌아갔어야 했나 그런 후회가 가끔씩 고개를 쳐든다. 어릴 때는 판 검사될 줄 알 정도로 나름 똑똑했는데 어쩌다 나이 마흔까지 그저 남편이 별문제 없이 편안할 때만 엄마가 힘들 때 도와줄 수 있을 뿐인, 내 통장에 모아놓은 돈 하나 없는 하찮은 여자인 건지. 불안과 가난은 사람이 꿈꾸지 못하게 하고 자기혐오마저 불러일으키는 지독한 악마다. 그 악마가 내 인생에서 사라진 줄 알았는데 요즘 다시 악마의 뿔 끄트머리가 살짝 보이려고 한다. 평소에 문제 있는 사람은 없다. 문제가 없는데 문제 있게 굴 이유가 없다. 사람은 문제상황이 발생했을 때 진면모가 보이는 법이다. 지금 우리 부부는 신혼 때 개인회생기간 5년을 극복한 이후로 두 번째 문제상황에 놓여있고 우리 부부의 진면모가 무엇인지 또 한 번 제대로 보여줄 때다. (이렇게 의연한 척이라도 해야 기분이 나아질 것 같다.)
남편이 다니던 회사의 위기는 한두 번이 아니긴 했다. 그래서 몇 년 전에도 다른 일자리를 알아본 적이 더러 있었다. 그때는 지원서를 열어두는 족족 면접제의가 오는 편이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아주 많이 달라졌다. 미국은 AI가 IT개발 인력을 대체함에 따라 하급의 단순 개발자들은 대폭 정리되고 AI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AI의 기술력을 극대화한 새로운 기획이 가능한 상급 및 임원급 개발자들만 살아 남고 있는데 한국은 그와 반대인 상황이다. 그래서 작은 회사의 경우 경영이 어려워지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정작 남겨야 하는 상급 개발자의 급여를 처리해주지 못하여 사실상 내치는 꼴이 되고 월급이 적은 하급 개발자들을 남겨두고 있다. 그렇게 작은 회사에서 자의든 타의든 기존 자리를 잃은 상급 개발자들은 다른 자리를 찾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결국 규모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고 남편도 이 상황이 장기전으로 간다면 자기 개인 역량을 믿고 프리랜서로 일해야 할지도 모른다.
회사입장에서는 단기적으로 봤을 때 돈을 아끼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세계 IT시장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므로 회사는 물론 국가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 알면서도 당장 나가는 돈 아끼는 거에만 급급한 이 놈의 한국 특 쪼잔뱅이 마인드는 어느 분야에서나 만연한 거라 놀랄 것도 없다. 내가 일하던 사회복지분야도 비슷한 문제를 여전히 반복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특유의 들끓고 급한 성미 때문에 대체로 차분히 거시적인 시스템을 먼저 구축하고 그 안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진행하는 능력이 선천적으로 부족하다. 과거에는 후진국이라 일단 돈이 없어서 그럴 여유가 없었다 치지만 아직도 그런 것을 보면 기질이라고 해야 할지. 예전에 남편 회사에서 시니어사업을 잠시 맡은 적이 있어서 업무역량강화 차원으로 국회의사당 회관에서 열린 사회복지사 처우 개선 방안을 위한 포럼에 참여한 적이 있다. 거기서 늘 그토록 궁금하던, 한국의 사회복지사들은 왜 이토록 박봉을 감수해야 하는지에 대해 중구난방으로 알고 있던 것들이 정리되었다.
미국은 사회적인 필요에 의해 제도가 만들어지고 그에 따른 시설이 만들어진 후 사회복지사들이 자리 잡은 정상적인 수순을 밟았기 때문에 사회복지사들의 급여 수준은 주요 직종의 평균 급여를 넘는다. 정상적인 수순이라는 것은 사회적인 인정이라는 부분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라서 미국은 사회복지사들에 대한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 별로 의문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미국의 사회복지사들의 소진(burn-out)이나 잦은 탈진 및 이직 문제가 없는 편이고 안정적인 생활과 직업적 사명감을 동시에 유지할 수 있다. 반면 한국은 사회적인 인식이 모이기 전에 급박하게 시설이 먼저 들어선 후 사회복지사들을 체계 없이 급히 뽑은 직원처럼 채용하여 아무렇게나 활용했다. 이런 폐해는 여전해서 1급 자격 소지자와 2급 자격 소지자가 실무에서 별 다른 구분 없이 일하는 문제가 지속되고 있다. 물론 장기적으로 일하는 경우 업무 역량에서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기관장이 되기 위해서도 1급 자격이 필수나 다름없지만 박봉과 소진으로 몇 년 일하다 탈진하는 사례가 많다. 가장 큰 문제는 가장 먼저 들어왔어야 하는 제도가 시설과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이 생긴 이후에 껴맞추기 식으로 들어섰기 때문에 사회복지시설과 사회복지사들의 필요성이나 중요성을 자꾸 의심하다 보니 사회복지사들의 급여는 여전히 주요 직종의 평균 급여에 못 미치는 실정이다.
사람이 누구한테 인정받고 보다 우월해지려고 사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인 인정에 대한 욕구는 인간으로서 당연하다. 다들 모인 자리에서 '좋은 일 하는데 돈은 안돼서 어쩌냐'는 식으로 치부되어 버리는 직업에 대한 사명감이나 자부심은 사그라지기 쉽다. 그러다 보면 사회복지사도 사람이라 클라이언트들을 사명감 있게 대하기 어려워진다. 동료들끼리 슬픈 농담으로 말하던, '우리가 수급자가 될 판'이라는 직업적인 감정이 기저에 깔려있기 때문에 결국은 사회복지 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리는 문제를 야기시킨다. 점점 살기 힘든 세상이라 사회복지 서비스는 더욱 필요한 상황인데 언제까지 이 악순환을 반복할 것인지 참 답답하다. 아무리 힘들어도 꾹 참고 버티면 죽을 때까지 보장되는 편인 일이라 준공무원급으로 여기는 직업이기도 하지만 공자도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못해먹겠지만 너는 해.'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도 그래서 때려치우고 후회 안 했는데 요즘 우리 집 상황이 이러니까 그냥 때려치우지 말걸 쭉 할걸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드니까 너무 무섭다. 불안과 가난은 안 하던 후회나 쓸데없는 후회를 제멋대로 초대하는 악마다.
그간 네이버 블로그 운영한 것과 최근 티스토리 운영해 가는 것에 광고를 붙여 수익화하려고 했는데 이것도 네이버 블로그는 방문자 및 조회수 기준, 티스토리는 최소 게시글 개수 및 주제의 명확화 등 기준이 있어서 애드 센스를 신청하려면 글을 한참 더 써 올려야 가능하다. 급하게 원고작가 일을 해보려고 지인으로부터 가장 자당 단가가 높은 '헬프 리치'를 추천받아서 지원서를 써냈다. 양성자 레벨을 부여받은 후 그다음은 주어진 키워드에 대한 테스트 원고를 내고 합격해야 정식 원고 신청이 가능하다고 했다. 테스트 원고의 키워드는 '분양권과 입주권의 차이', '교통사고 후유증'이었다. 나는 '분양권과 입주권의 차이'를 선택했고 평소 부동산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데도 나름 정성을 들여 테스트 원고를 썼다.
그다음은 가이드에 맞게 썼는지 자사 서버에 접속하여 점검을 해야 하는데 일시 서버 사용 권한을 요청하려면 카톡으로 메시지를 보내라 했다. 공지에 있던 대로 카톡에서 헬프리치 개인 아이디를 검색하여 찾고 톡을 보내니 갑자기 헬프리치 개인톡은 24개의 질문지를 보내왔다. 자사의 원고 작성 가이드북에 관련된 질문들이었다. 이런 시험까지 있다는 건 지인으로부터 추천받을 때 들은 바가 없었는데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가이드북을 꼼꼼히 읽어가며 답을 찾아 완답하여 답장을 보냈다. 가이드북에 쓰여있는 걸 보고 답을 했고 문제도 단답형 문제였기 때문에 몇 문제 틀릴 수도 있지만 대부분 맞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쪽에서 질문지를 보냈을 때 메시지에 분명히 '최소 10개 이상은 답이 나와야'라고 한 걸 보면 충분히 통과하고 일시 서버 사용 권한을 부여받을 줄 알았다.
그로부터 3일이 지나 온 답장은 '답변 부실. 양성방 탈락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몇 개 틀려서 탈락인 건지, 몇 번 문제가 틀린 건지 알 수 있냐고 물었으나 메시지 확인도 안 한 채 아무런 피드백 없이 수일이 지나갔다. 너무도 답답한 마음에 헬프리치 개인톡이 아닌 양성방이라고 하는 원고검수를 주고받는 단톡방에 그 개인톡에서 주고받은 메시지들을 캡처해서 올리고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묻자마자 나는 그 방에서 강퇴당해버렸다. 이건 마치 어느 회사에 1차 서류를 넣고 합격해서 2차 면접까지 갔는데 면접 자리에서 회사에 대한 기타 질문을 하자마자 갑자기 양팔이 붙들려 쫓겨가는 형국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무리 내가 회사를 직접 가서 면접을 본 수고로움은 아니었다 해도 이 모든 과정은 너무 화났다. 이 회사를 추천해 준 지인도 동종업을 하고 있는데 그런 질문지를 보내는 일은 처음 듣는다고 했다.
아주 오래전 어느 사회복지기관에 면접을 갔다가 내 스펙의 공백기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나니 갑자기 어느 면접관이 '아빠 없이 산 게 자랑이라고 생각하나요?'라고 물었던 이후로 급은 경미하지만 오래간만에 부들부들이다. 그건 그래도 실제 면접에서 벌어진 일이라 그 자리에서 '별다른 고생 없이 살아온 이들에 비해서는 많은 걸 헤쳐나가며 보다 더 성장한 부분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른 면접자들도 함께인 이 자리에서 그런 질문은 많이 불쾌하네요.'라고 떨어질 생각으로 대응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 면접관도 멋쩍은 듯이 '아 그냥 압박면접일뿐입니다.'라고 개소리라도 대꾸는 해줬는데 이건 뭐 대꾸도 못한 채 강퇴라니. 아무리 원고작가 일 하려는 인력이 넘쳐나서 갑질을 한다 해도 최소한의 매너도 없는 이 업체는 롱런할 수 없을 것이다. 남편은 덩달아 열받으며 우리가 만드는 플랫폼에 원고작가수입 코너도 만들어서 잡아먹어버리자고 했다. 현실감이 있는 소리든 없는 소리든 가장 솔깃한 위로였다. 이럴 줄 모르고 써놨던 테스트 원고는 좋게 말하면 이제 글 권한을 넘길 필요가 없는 내 것이기에 티스토리에 정보글 코너에 올려서 활용 중이다.
나도 남편도 다 열이 뻗치지만 각자 또 할 일을 바쁘게 하면서 폭풍전야 같은 나날이 지속되고 있다. 지난주 다른 곳 면접을 본 남편은 면접은 훌륭하게 치렀으나 역시나 기존 연봉정보와 남편의 일당백인 과한 역량이 자기네 회사가 깜냥이 부족하다며 오히려 탈락했다. 그리고 어제 다른 곳 면접을 치렀고 내일다른 곳 면접을 치러야 한다. 이제는 너무 몸집이 커다라진 남편이라 대기업의 부속으로도, 작은 회사의 임원으로도 부대끼는 난제라 예전처럼 면접을 잘 치렀다고 해서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남편이 다시 웃음기가 사라지고 있고 조금이라도 기분 전환을 해야만 했다. 돈 별로 안 쓰고 기분전환할 게 뭐가 있나 하다가 요즘 재미들인 thread 스친들이 가끔 글을 올리곤 했던 인천 장수동에 있는 800년짜리 은행나무가 떠올랐다. 지난번 가족여행이 파투 난 이후로 이제 가을도 끝자락인데 좀 아쉽던 터라 나무 하나 보고 오는 건 비쌀 것도 없고 쉬운 일이니 가봤다. 바로 옆이 인천대공원이니 대공원 먼저 쭉 돌며 단풍구경을 실컷 한 후에 은행나무로 정점을 찍는 코스가 정석이겠지만 우리는 인천 주민이라 인천대공원은 이미 많이 봐온 터라 패스했다. 집에서 느지막이 나가 은행나무 옆 식당가 골목에서 점심 겸 저녁을 먹고 은행나무만 보고 왔다.
도착하기 전까지 멀리서 언뜻 지나가며 본 은행나무는 뭐 막상 별거 없네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나 밥을 먹고 은행나무 앞에 제대로 다가서는 순간 그 생각은 산산이 깨졌다. 해가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봤음에도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장엄함과 800년 세월의 풍성함, 노란 황금빛의 화려함에 압도되었다.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절로 내는 '우와'하는 작은 탄성이 모여 어떤 성지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800년의 은행나무가 실존하며 뻗치는 영험한 기운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서울 골목동네에서 태어나 자라온 나는 이런 수호목을 본 적이 없어서 경외감마저 들었다. 나도 보려고 와놓고 주차를 하려고 몇 바퀴를 돌다 겨우 갓길에 주차를 하고 돌아올 때만 해도 짜증이 솟구쳐서 왜 다들 난리인가 했는데 나무 앞에 서는 순간 그저 갓(god) 나무라서 바로 이해되었다. 800년이나 살아온 은행나무 품으로 100년도 겨우 사는 인간들이 하나들 파고들었다.
초1춘기지만 엄마아빠 사진은 정성껏 ㅋ
매일 오늘만 같아라~~
초1춘기 딸은 요새 모든 외출에 심드렁해서 데리고 나가는 거 자체가 진이 빠지곤 했는데 이 날은 웬일로 선뜻 나서더니 밖에서도 내내 기분이 좋았다. 그런 아이를 보는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고 오래간만에 그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아이와 함께 웃으며 사진도 많이 찍었다. 남편도 몇 년 간 자기는 살쪄있기도 하고 사진 찍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 하여 같이 사진 못 찍은 지 오래였는데 이 날은 웬일로 카메라 안에 수줍게 들어섰다. 비록 나무 하나뿐이라 배경은 다 똑같지만 셋이 함께였고 나무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해가 금세 져서 어두워질 때까지 이리 돌고 저리 돌며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머물며 마음속으로 영험한 은행나무님께 빌었다. 우리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우리가 하려는 일들 다 잘 되기를. 남편이 힘내기를. 아이와 나도 매일 이 날 같기를. 부디 저희를 굽어 살펴주소서. 그리고 블로그를 포함하여 내 글을 읽어주는, 아직은 별로 없는 200명이 채 안 되는 독자들, 글 하나 올릴 때마다 서너 명씩 붙어주는 소중한 독자들이 복 받기를 기도했다. 당신들의 응원이 씨앗이 되어 보다 더 성장하고 좋은 플랫폼도 만들고 좋은 책도 내겠노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부디 다가올 연말을 웃으며 보낼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