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소개팅 후 연애 두 달 만에 한 달 여 동거를 시작했고 바로 혼인신고를 하여 법적 부부가 되었다. 결혼식은 1년 반 정도 살다가 뒤늦게 치렀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옷 몇 가지 챙겨 일단 남편이 살던 집으로 바로 들어간 날이 2015년 7월 21일이었다. 열흘 정도는 휴가처럼 보내다가 이직할 기관 면접을 보고 8월 중순 경부터는 생전 처음인 인천 동네에서 일자리까지 안착하고 본격적인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엄마는 욕을 욕을 해가며 너 무슨 도망이라도 가는 거냐며 택배로 별 볼일 없는 못 다 가져간 짐들을 꾸려 보내줬다. 사람이 사람에게 눈깔이 돌면 그럴 수 있다는 걸 나도 처음 경험했다. 그렇게 엄청 사랑했던 것도 맞고 다방면으로 쉽지 않은 나를 감당할 유일한 남자가 아닐까 하는 확신이 있었다.
아무리 별볼 일 없는 가난한 모녀 가정으로 살아왔어도 자존심 하나는 제일이었다. 누군가와 연애가 무르익어가도 결국은 결혼에서 고꾸라지거나 아니면 어찌 결혼을 한다 해도 내가 납작 엎드려 할 말도 못 하고 살 길 바라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아서 애초에 독신주의로 살았다. 실제로 남자친구 중에 졸업을 앞둔 한의대생이 있었는데 어느 날 연인들끼리 통상하는 결혼놀이 같은 대화 중에 너무나 해맑게
"나중에 나는 내 병원 차려줄 수 있는 여자랑 결혼하려고 했는데."라고 해서 그럼 나랑 왜 사귀냐 했더니
"그게 좀 고민이긴 하지만 혹시 우리가 결혼한다면 네가 수완은 좋으니 병원 홍보나 영업은 잘할 거 같아."라고 개소리 시전하는 바람에 바로 손절한 일도 있었다.
모든 연애가 결혼으로 갈 수도 없는 거고 꼭 결혼을 염두하고 연애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대방에 대한 존중은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머 다행이다! 그래도 난 합격인 거네!' 할 줄 알았던 걸까? 왜 내 인생은 제멋대로 구겨버리고 자기 인생에 원조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별 볼 일 없는 집 애니까 그렇게 생각해도 된다고 생각한 걸까? 그의 해맑음에 화낼 의지도 상실했고 그 대화 후 며칠 안 가서 이별을 통보했다. 모든 연애가 결혼으로 가는 건 아니지만 내심 나를 깎아내리고 있는 것 같으니 꺼져달라고 했다. 내 말에 무슨 변명을 하긴 했던 것 같은데 솔직히 귀담아듣지 않아서 기억도 안 난다. 쓰레기의 쓰레기 같은 변명을 뭣하러 기억할까.
아쉬울 것도 없었다. 남편을 포함한 내 모든 연애사를 통틀어 가장 못생기고 뚱뚱한 남자친구 따위, 인성하나 좋은 줄 알고 사귀었을 뿐인데 그것도 아니라면 더 갈 이유가 없었다. 친구랑 이런저런 살아온 이야기를 하다가 그 연애사를 말하니 친구가 더 열받아서 굳이 수소문하는 바람에 알게 된 근황으로는 지방 어디에 한의원을 차렸고 살은 엄청 뺐지만 여전히 못생겼더라. 성인 여자 한 명 무게만큼 살을 빼면 조금은 잘 생겨져야 하지 않나? 그래 뭐 원래 병원만 잘 되면 그만인 인생이니까 못생긴 건 아무 상관없겠지. 워낙 동네에서 어른들에게 깍듯하고 학교 선후배 사이에서도 예의범절로 소문난 사람이어서 내가 그와 헤어진 이유가 너무나 이해타산적이어서 너무나 별로인 이유일줄은 그 당시에 아무도 몰랐다.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아는 거다. 그래도 그런 놈 만나봐서 지금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던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해서 잘 살고 있으니 역시 경험은 재산이다.
독신주의 형성에는 아빠가 보여준 엄마와 나에게 해온 끔찍한 짓거리들 때문에 기저에 깔려있던 남성에 대한 불신도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의 남편과 그렇게나 다급하게 결혼한 것은 내가 걱정한 세 가지 중 어느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우리 엄마는 처음에는 남편처럼 의지하고 살던 내가 갑자기 두 달 만난 남자랑 결혼을 한다 하니 식겁하며 너 무슨 별 볼 일 있다고 그렇게 남자가 급하게 구는 거냐며 혹시 딸린 애 있는 남자 아닌지 서류 떼 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할 정도로 불신이 가득했다. 정작 남편을 만나보고는 왜 그렇게 다급히 구는지 이해 간다며 손을 들어 버렸다. 남편이 자기 어머니에게 인사를 가자고 했을 때 내가 이런저런 걱정을 하는 걸 보고 남편은 계속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래도'라고 했다.'우리 엄마는 안 그래' 그런 말은 일단 안 믿는 게 현명하고 실제로 뵙고 판단하면 될 일이었다.
지방에 살고 계신 어머님께 처음 인사를 간 그날의 그 긴장감이란. 허나 긴장된다 해놓고 그날 왠지 어머님 집에서 자고 올 것 같아서 작은 짐가방도 가져간 모순은 또 어떻고. 이런저런 대화 끝에 나를 안아주시며 너희 둘 다 불쌍하게 살았으니 서로 보듬어 주고 잘 살라고 하셨을 때 뜨겁게 흐르던 눈물. 어머님과 뭣 모르는 9살, 6살 조카들 모두 잠든 늦은 밤, 형네 부부와 함께 따로 넷이서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 모두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누군가 자기 숙모가 홀로 아들 키워놓고 그 아들이 결혼한다고 여자 데리고 왔을 때, 그 여자가 홀어머니 자식이라서 싫다며 초반에 대놓고 싫어했다는 지독한 모순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에 비하면 우리 어머님은 된 분이었다. 원래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라서 내심 더 환한 빛깔의 며느리를 기대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있는 그대로 본인 아들의 선택을 인정해 주셨다. 이렇듯 나의 전부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내 마음과 머릿속의 모든 화려한 조명이 죄다 그에게 빛을 쏟아 주었다.
같이 살기 시작한 건 2015년 7월 21일. 혼인신고일은 같은 년도 9월 15일. 결혼식 날짜는 2016년 11월 19일.. 도대체 결혼기념일을 뭘로 해야 할까? 확실한 건 다 모여도 별로 친척 수가 없고 그다지 전체가 다 모이지도 않는 친정보다는 시가 쪽 행사에 내가 갈 적마다 어머님이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단 것이다.
"야는 누구여?"
"잉, 우리 집 둘째 며느리여"
"무신, 결혼식을 해야제!"
어머님은 그 많은 친척들에게 늘 가타부터 설명하기도 귀찮아지셨는지 애초에 우리가 살면서 돈 모아 결혼식 하겠다 했는데도 어느 날 갑자기 그냥 하라며 돈을 대주시고 결혼식을 강행하셨다. 결혼식 이후로 어머님은 입 아프게 여러 말할 필요가 없어졌고 나도 그간 멋쩍고 애매한 입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엄연히 법적으로 공인받고 살아온 1년 넘는 시간을 버리고 결혼연차가 깎이는 억울함은 있었지만 회사생활도 일부러 버리는 경력이란 것도 있으니까 나름 괜찮은 결정이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점차 결혼기념일은 아무 날이어도 상관 없어졌다. 실제 살아온 날짜로 따지면 10년 차에 접어들었는데 올해는 남편이 결혼기념일을 까먹고 있었고 나도 그러거나 말 거나였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에는 내가 까먹었다. 가끔 참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연재에도 썼지만 신혼 초반에 터진 개인회생절차를 밟느라 초반에는 기념한다 해도 남편이 막 즐겁게 외출을 나설 때가 아니라 집에서 남편이 굽는 웰메이드 스테이크와 와인을 즐기며 보냈다. 그 뒤에도 애가 어리니 나가기도 뭣하고 여전히 집에서 남편이 해주는 요리를 먹으며 기념했다. 남편의 요리실력은 수준급이어서 결혼기념일은 맛있는 음식 얻어먹는 날이라 즐거웠다. 여전히 아이는 고작 초등학교 1학년이니 이번 결혼기념일도 그렇게 보내겠지 싶었다.
사실 해가 갈수록 혼자 있는 게 제일이고 남편과 단둘이 있는 시간은 어쩐지 어색해서 선뜻 데이트에 나서지 않는다. 꽃이라거나 소소한 선물은 안 받냐고? 신혼 때 한 두 번 꽃은 받아본 것 같은데 생활비를 받아쓰는 입장이라 수중에 돈이 없다는 이유로 나는 저 사람의 결혼을 기념해주지 않는데 나만 기념받는 것도 웃겨서 언제부턴가 별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기념일이 기념일 다울려면 기념을 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결혼 생활 10년 중 5년을 빚 갚느라 애쓰고 그 뒤 5년은 겨우 디폴트가 된 포지션에서 어린아이를 키우며 또 여전히 애쓰고 있고 아직 남편이 혼자 살던 집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 솔직히 흥이 나지는 않는다. 이만하면 다행이다일 뿐 이제 여유롭다에 이르지 못했으니까. 정확히 언제부터다라고 할 것 없이 서서히 마음속 달력에서 그다지 표시해두지 않는 날짜, 어쩌다 기억이 나는 그런 날이 돼버렸다.
요즘은 남편이 회사를 안 나가고 있기 때문에 아이가 학교 간 낮 시간 동안 그럴싸한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가볼까 아주 잠깐 생각했으나 관뒀다. 일하다 새벽에 자고 몇 시간 못 잔 채 아이 아침밥 해먹이고 학교 보내고 나니 낮에 너무 피곤해서 만사 귀찮았다. 게다가 늘 가성비를 따지는 남편이라 별 좋은 반응이 아닐 게 뻔해서 말도 안 꺼냈다. 그런 곳은 나랑 취미가 맞는 친구들과 가끔 즐겨도 충분히 즐거우니까. 그냥 낮에 못 잔 잠자고 대충 때우다 아이와 함께하는 저녁시간에 식사 및 기념을 동시에 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올해 결혼기념일은 남편이 낮밤 바뀐 생활 중이라 그나마 얻어먹던 남편의 요리도 물 건너갔고 나도 기념일을 핑계 잡고 주방 파업이니 아이와 다 같이 먹기 좋은 메뉴로 닭갈비를 시켜 먹었다.내심 케이크라도 하나 살 걸 그랬나 좀 아쉽긴 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고 빨리 애 재우고 읽고 있는 책이나 실컷 읽고 싶을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며칠 전 남편이 드디어 이직할 회사가 확정되면서 한 시름 놓았기 때문에 배달음식이고 뭐고 그냥 참 다행이다 싶었다. 이제 퇴사 절차를 밟아야 할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받지 못한 두 달 여간의 월급과 퇴직금에 대한 차용증서 등 골치 아픈 일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큰 걱정은 덜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10월 중순경부터 지금까지 대략 한 달 조금 넘게 쉬었을 뿐인데 남편은 중3 때부터 이미 혼자 살며 쉬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영 낯설 다했다. 처음에는 좀 모아둔 돈 까먹어가며 이직 준비하면 된다고 하더니 나이도 한참 먹고 직급도 임원급이라 예전처럼 선뜻 면접제의가 들어오지 않으니 금세 불안해했다. 몇 군데 면접을 봐도 그 역시 예전처럼 다 붙고 결정하는 행복한 고민이 아니라 되면 좋겠다 하며 절박한 입장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세 군데 면접을 보고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은 아니지만 두 번째로 기대했던 곳으로 가게 되었다. 올해는 결혼기념일이고 뭐고 그냥 난국을 잘 헤쳐나간 남편에게 감사할 따름이고 그걸로 충분하다.
이상하게 남편이 집에 있게 된 순간부터 더욱 새벽 늦게 자면서 생활이 꼬였는데 이제 다시 남편이 회사를 나감으로써 저절로 다시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딱 남편이 집에 있게 된 기간만큼 운동마저 손 놔버렸다. 아무 상관없는데 이상하게 그렇게 됐다. 겉으로는 남편에게 별 신경 쓰지 않듯이 일 알아보면서 우리 사업 만드는 거 집중하면 된다며 괜찮다 했지만 내심 나도 의욕이 꺾인 것일까. 별로 해주는 것도 없고 주 3회는 아이 학원 픽드롭한다고 혼자 잠시 나갔다 오는데도 괜히 신경 쓰이던 나날들이었다. 남편이 자기 자리를 못 찾고 있으니 나도 덩달아 내 할 일 집중 못하고 헤맸다. 어머님이 말씀하시길 너네 부부는 어째 너 임신했을 때 아들도 같이 살찌고 이 놈 아프면 저 놈이 같이 아픈 거 보면 한 날 한시에 죽게 생겼다고. 그게 그렇게 생활에 유용하지도 않을뿐더러 좋지만은 않지만어머님은 뭔가 우리가 행복해보인다는 듯이 말씀하셨다.어쩌면 너네만은 당신이나 우리 엄마같이 살지 말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주문일지도 모른다.
12월 둘째 주부터는 다시 남편이 회사를 나가고 나의 오롯한 낮 시간이 확보될 것이기에 솔직히 그게 가장 좋다. 덩달아 헤매느라 글도 잘 안 써져서 겨우 연재날짜 맞추었는데 이제 정신 차리고 운동도 다시 하고 글쓰기에도 집중해야겠다. 올해 결혼기념일은 여러 이슈가 있어서 원래보다도 더 흐지부지 되었지만 결혼기념일이야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계속 있으니까 괜찮다. 언젠가 기념일답게 빛날 때도 오겠지. 조금 섭섭한 내 마음은 그 다음날 아이 학원 가 있을 때마다 가는 단골 카페에서 브런치 세트를 즐기는 것으로 달래 보았다. 고작 한 시간이라 늘 커피 한잔만 마시며 일하곤 했는데 좀 다른 거 먹는 것뿐인데도 기분전환 되었다. 현실이 어떻든 자기 기분 달래주는 건 자기 스스로 하는 게 제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