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거실은 다른 집들과 달리 은밀하다. 누군가 우리 집에 오면 신발장을 넘어 들어와 양쪽으로 시선을 둘러보아도 왼편으로 방 2개와 정면에 화장실, 오른편으로 주방과 약간의 여유 공간만 보인다. 도대체 어디 앉아있어야 할지 조금 난감해하면서 부엌 옆 여유공간 쪽으로 주춤주춤 가보아도 각종 주방기기와 잡동사니가 있는 수납장과 에어컨과 커다란 창만 있을 뿐이다. 그러다 오른쪽 구석에 방문이 없는 방을 보다가 '엥? 여기가 거실이야?'하고 발견한다. 설계도를 빗대어 말하자면 '방 3'에 해당하는 가장 작은 방을 옷방으로 쓰다가 소파와 방 크기에 비해 커다란 텔레비전, 책장과 이동식 책상, 스탠드를 두고 거실로 쓰고 있다. 방문은 신혼 때 싸우다가 박살난 이후로 미련없이 떼버린터라 한결 수월했다. 때로는 그지 같은 일도 지나고나면 오히려 좋을 수 있다. 방에 붙어있는 작은 베란다문에는 아이보리 컬러에 은은한 꽃자수가 들어가 있는 아기자기한 커튼을 쳐놨다. 곧 소파 위에는 남편이 그리는 그림 하나를 화룡점정으로 걸 생각이다. 대충 그림이 그려지는지?좁은 집도 살기 나름이다.
이토록 아늑하다 보니 손님을 위한 응접실 기능보다는 서재처럼 쓰고 있고 영화를 보며 술 한잔 하기 좋은 공간이다. 남편이 혼자 살던 집에 갑자기 쳐들어오듯 내가 들어와 신혼생활을 시작하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쭉 10년을 살고 있다. 아이가 커져서 가족 침대방으로 쓰던 방 2를 아이방으로 만들고부엌 공간과 과거의 방 3을 가르는 벽을 허물어 거실을 확장하려 했으나 주벽이라 안된다 하여 나름 고안해 낸 방법이었다. 이게 최선이어서 만든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각자 몰입하기 좋은 공간이라 부부끼리 눈치싸움이 치열할 정도다. 요즘은 남편이 재택근무를 하는 바람에 새벽 시간에 내 서재로서는 활용하지 못하는 편이고 가끔 둘이 어쩌다 스케줄이 맞을 때면 같이 심야 영화를 보곤 한다.
남편이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고 오전에 잠을 자서 자연스럽게 오전에는 내가 서재로 쓴다.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면 커피를 내리고 소파에 앉아 뭘 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며 노트북을 연다. 왼쪽 벽면 책장에 꽂힌, 이제는 조금씩 먼지가 쌓이기 시작한 법무사 수험 교재와 노트들을 보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저 두꺼운 교재들이 나를 정녕 버리려는 심산이냐고 노려본다. 아니야 진정해. 네이버 블로그, 브런치스토리 등에 꾸준히 글을 올리는 것도 바쁘고 새롭게 티스토리도 시작했어. 남편과 기획 중인 플랫폼도 완료해야 하고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채널도 승인만 받아놓고 시작도 못했다고. 유튜브 채널도 열어야 하고 플랫폼 다 만들면 법인을 내 이름으로 낼 거라 투자유치발표도 내가할 건데 일이 잘 풀리면 더 바빠질지도 몰라. 벌려놓은 일들이 안정화되고 뚜렷해지면 그때 다시 공부하겠지만 지금은 콘텐츠 사업에 몰입해야 해. 잠시 우선순위가 밀린 것뿐이야. 순위라는 건 늘 바뀌는 거야. 그렇게 법무사 교재들을 진정시키고 나니 이제는 이 방 바로 옆에 붙어있는 작은 베란다에서 앵무새들이 자기들도 좀 봐달라고 깩깩 거린다. 이 공간의 최상의 몰입도를 방해하는 유일한 존재들이다. 아이가 키우자 했지만 아이를 자꾸 쪼아대서 지금은 내가 키우고 있는데 나는 겨우 굶기지나 않고 있을 뿐 고물고물 놀아줄 여력이 별로 없다. 처음에 두 마리를 데려온 것이 그나마 신의 한 수였다. 한 마리만 데려왔다면 벌써 심심해 죽었을 거다.
불쌍한 건 앵무새뿐이 아니다. 거실방 베란다를 통해 들어오는 가을 햇살을 가만히 느끼다가 그 햇살이 뻗는 직선을 쫓아가보니 남편이 출퇴근마다 메고 다니던 까만 백팩 위에 뽀얗게 가라앉은 먼지가 보인다. 남편의 이번 재택근무는 사실상 퇴사의 수순을 밟고 있는 전 단계이다. 두어 달 급여도 밀려있고 퇴직금도 불투명하단다. 남편은 며칠 전 전화 온 회장이 기다려달라고만 해대는 걸 듣다가 최악의 상황까지 자신을 붙잡기 위해서 미리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경과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던 점을 탓하며 분노했다. 새벽이고 뭐고 에러가 터지면 즉각 기계처럼 해결해 주었고 가족여행이든 명절이든 어디를 가도 바다거북이처럼 무겁고 시커먼 노트북 가방을 메고 다녔다. 기획, 프로그램 개발, 디자인 등 일당백으로 일한 건 그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금세 임원도 달았지만 세월이 갈수록 어째 재주 많은 걸 이용만 당하는 것 같은 억울함과 지분 등 기약 없는 약속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중소기업인데 이 정도 벌면 꽤 괜찮다는 안정감들이 뒤섞여 다른 곳에 눈을 돌릴까 하다가도 또 그냥 주저앉고 일상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하필 IT분야 취업난이 최악인 이 시점에, 이제는 나이도 먹을 대로 먹은 마당에 다른 데 가야 하다니. 늘 으하하하 시끄럽던 남편이 웃지를 않고 조용하니까 우리 집 같지 않았다. 그저 초1춘기 딸과 40춘기인 나의 시도 때도 없는 전쟁 소리만이 우리 집이 확실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무리 위기가 온다 한들 신혼 때보다 최악이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는 결혼식은 미룬 채 대뜸 혼인신고를 하고 살았다. 그렇게 신혼 3개월 정도 됐을 때 남편의 개인회생이 시작됐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개인회생이 뭔지도 몰랐다. 겨우 하나 있는 작은 집, 작은 자동차가 죄 가압류 되고 매달 치명적인 금액을 5년간 분납하며 갚아나가야 했다. 그게 왜 터진 건데라고 물어보니 남편은 이미 20대 후반부터 자기 스승이던 대표와 공동대표로 회사를 운영해 왔는데 자신은 개발에 집중하고 그 다른 대표가 대외적인 업무를 주로 맡았는데 그 사람이 채무를 잔뜩 만들어버렸고 공동대표로서 책임을 반씩 나눌 수밖에 없는 거라고 했다. 일하는 내내 어리다고 무시하듯 경과 보고도 잘 안 해주며 자기 혼자 잘났다고 돌아다녀 놓고 막판에 망하니까 사이좋게 책임을 나누자니.. 정말 이 세상에는 개소리가 너무 많다.
초반에는 마트에서 감자 사 오면 감자 심자 하고 호박을 사 오면 호박도 심자 말할 정도로 힘들었다. 그런 말을 그만두기 위해서 남편은 다른 회사에 볼모로 잡혀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투잡 쓰리잡 하듯 미친 듯이 빚 갚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인양 살았다. 처음에는 열불이 나고 기가 막혀서 방안에 문을 닫고 틀어박혀 있어도 봤지만 결국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중간에는 아이를 낳고 남편이 일하느라 신경 쓰지 못하는 살림과 육아에만 매진하며 지옥의 5년을 함께 버텼다. 그렇다고 남편이 집안일을 완전히 등 뒤로 둔 사람도 아니었다. 주말에는 요리도 잘해주고 화장실 청소 담당도 해주었다. 아이도 나보다 더 보들보들하게 구는 아빠를 더 좋아한다. 나 못지않은 과거를 가진 탓에 시골에서 중3 때부터 집을 나와 혼자 돈 벌며 살았고 서울에 올라와 자리 잡고 개인회생 5년까지.. 생활력만큼은 내가 아는 다른 집 남편들 다 갖다 놔도 제일일 거라고 본다. 이 사람하고 살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굶어 죽지는 않겠다는 믿음과 남편이 으하하하 하며 입매를 크게 벌리며 웃는 모습을 보면 나도 저절로 입가가 벌어지곤 한다. 개인회생을 웃으며 홀로 이겨내는 걸 보면서 남편을 존경하게 되었다. 단지 너무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느낌이 없지 않은 사람이라 적당히 가끔 눌러줄 뿐이다.
모든 게 지나가면 후련할 줄만 알았는데 그렇게 5년이 끝나고 나니 이제 무슨 목표를 향해야 하나 싶은 이상한 허무함이 있었다. 그동안은 빚 갚느라 다른 건 쳐다볼 여력도 없다가 다 갚고 보니 쓸데없이 주변이 보였다. 빚이 없었다는 이유로 5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더 큰 집으로 이사 가고 승승장구한 지인들을 보니 그 많은 빚을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갚아나갈 정도의 능력이면 빚만 없었어도 우리도 못지않게 잘 살고 있을 텐데.. 그런 생각에 며칠간은 잠도 안 왔다. 그런 내 모습이 약간 생경했다. 아빠랑 살며 이러다 누군가 죽지 않을까 하는 지옥일 때도, 엄마랑 살며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삶이라 내 스펙 쌓는 거는 꿈도 못 꾸고 많은 걸 포기하고 당장 벌 돈만 쫓아다닐 때도 나는 주변인들의 삶을 빗대어 고통스러워한 적이 거의 없었다. 누구는 가난해도 화목했고 누구는 화목하지는 않아도 유복했고 누구는 둘 다 가졌다. 누군가는 딱히 화목도 유복도 아니지만 평범하기라도 했다. 그도 아니면 적어도 젊은 날 갑자기 가망이 없다는 병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 선 적은 없었다. 나는 아무리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봐도 주변인들과 비교조차 불가능한 지경이라 오히려 발랄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혼자 버텨야 한 지난한 삶이 지나가고 남편을 만나서 작지만 내 집이란 게 생기고 희망이 생기고 처음 타보는 내 차가 생기고 별로 웃을 일 없던 내가 웃는 날들이 생기고 그렇게 하나 둘 뭔가가 생기니까 이제 나도 모르게 해 본 적 없던 비교질을 하고 있는 거였다. 그럴 때 더 한심한 생각에 빠져들지 않고 나 자신의 삶에 집중하도록 정신줄을 잘 붙들어 잡아야 한다.
비교질이라고 말했지만 소중한 지인들이 잘 사는 건좋은 일이고 배 아픈 건 절대 아니다.오히려 나는 돈주고도 못할 파란만장한 경험으로 다져진 스토리는 나만 할 수 있다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다. 단지 남편의 빛날 수 있었던 시절이 빚 갚느라 다 지나간 것이 너무나 아까웠다. 회생이 다 끝나고 지나간 명절 어느 날, 시가 식구들 다 모인 자리에서 일종의 무용담처럼 그때의 감자 심자 호박 심자 이야기를 했는데 형님과 아주버님은 재밌어하며 웃는데 어머님은 눈물 날 거 같으니 그만 떠들라고 하셨다. 개인회생도 물리쳤는데 일자리야 이제 아이도 좀 컸으니 여차하면 나도 알아보면 되고 원고작가 일도 하면 되고 많은 돈은 아니어도 잠시동안은 까먹고 지낼 돈 정도는 있으니 남편도 그간 일자리 연봉 낮춰서 지원하면 그래도 한 자리조차 없을까 하면서 애써 기운을 내보고 있다. 남편도 이틀정도는 돌아버릴라고 하더니 금세 멘털이 돌아와서 지금은 하루이틀 지나갈수록 웃음의 데시벨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다. '그래도 발랄하게' 정신은 역시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원래 지난 일요일은 짧게 1박 2일로 단풍구경 겸 가족여행을 가려고 했다. 동네 길가 단풍과는 격이 다른 풍경도 감상하고 오래간만에 여유도 부려보고 싶었다. 노는 것 외에 목적도 따로 있었다. 갑자기 이 시국에 1인 개발자로 뛰어드는 남편의 이야기,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법무사 공부하던 것도 잠시 놓고 이제 오랜 꿈이던 작가의 길을 가는 나의 이야기, 아빠와 함께 수집한 자연물로 작품을 만드는 아이의 활동을 담은 콘텐츠를 찍으려고 했다. 월요일에 아이 학교 결석을 위해 체험활동 신청서까지 설레는 마음으로 써냈지만 결국 우리는 가지 못했다. 그 사이에 또 아이와 내가 한 판해버리고 만 것이다. 큰 건은 아니었지만 또 이런 상태로 여행 가면 지난여름휴가처럼 망칠 게 뻔하다는 생각에 위약금 2만 원 정도를 내면서 숙소를 취소했다.
너만 그런 거 아니고 우리 집도 비슷한 일 있다고, 초1춘기 중2 못지않다고 누가 위로해 주면 좋겠다. 나는 아이 낳고 몇 년째 자기 계발 중이면서 왜 이렇게 아이에게는 변화를 느긋이 기다려주지 못하는지... 남편 못지않게 나 잘난 맛에 사는 나인데 자식일 만큼은 정말 작아지고, 한심하고, 늘 어렵다. 정작 요즘의 나는 '그래도 발랄하게'정신을 잊고 사는 듯하다. 한편 지난 10월에 다녀온 브런치스토리 팝업 전시에서 정문정 작가의 작가팁 메모를 가져온 것 중에 하나가 나를 쿡 찌른다. '글을 쓰는 시간과 장소를 정해라'. 초반에 비해 글 쓰는 속도가 빨라졌고 남편과 진행 중인 기획도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고 있지만 또 그만큼 다른 할 일들도 많아지다 보니 현격히 줄어든 반찬 수나 손 놓은 운동 등 금이 간 일상도 눈에 띈다. 여행은 개뿔, 일상 회복부터 시급하다. 우리 가족의 이 상황이 위기가 아닌 기회가 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