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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잠 Jul 01. 2023

72색 색연필


"눈을 4초에 한 번은 깜빡여야 합니다."

안과 의사가 말했다.


인공눈물을 처방받고 약국으로 가면서 나는 4초라는 시간을 속으로 재어본다.

그러니까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눈을 덜 깜빡인다는 거지?

오호. 눈싸움하면 올킬이겠는걸? 안압도 높고 속눈썹도 찌른다는데 난 뭐가 좋은지 웃고 있다.

나이가 들면 여기저기 고장 나는 거지 뭘. 그게다 인생이지. 다 그런 거 아니겠어!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오늘은 아이 학교 준비물을 돋보기를 쓰고 천천히 살펴보니 미술시간이 있다.

내가 아끼는 72색 색연필을 서랍에서 꺼내어 아이한테 보여주었다.

" 미술시간에 색연필 가져오라는데 이걸로 그려볼텨?"


아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날 쳐다본다.

이거 엄마가 아끼는 건데? 하고 아는 표정이다

그리고 우아한 여자가 비스듬히 돌아보는 색연필케이스를 내려다보았다.

72색...? 아이가 케이스를 열어 여러 가지 색을 보면서 손바닥으로 색연필들을 누르며 굴려본다.


' 와. 색이 엄청 많다.'

아이는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 오키. 내가 72색을 7색으로 만들어줄게" 아이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 으휴. 엄마가 좋아하는 색연필이니까 잃어버리지 말고 잘 챙겨 와."나도 웃으며 받아쳤다.


갑자기 아이가 전에 가지고 다녔던 지구색연필세트가 생각났다.

여러 가지 색이 가득했던 상자가 어느 날 보니 10가지 색도 안 남아있었다.

허무한 마음이 들었다. 색색 가득했던 첫날엔 이걸로 아이가 얼마나 많은 그림을 그릴까 설레었었다.

그리고 하나 둘 아이가 잃어버린 색들 중엔 내가 좋아하는 색도 많았다.

아이 이름을 일일이 써붙였는데도 그 많은 색연필을 다시 찾지 못했다.

살면서 사랑하는 것들이 사라진다는 것은 몇 가지 남지 않은 색연필 세트 같은 마음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명품백이나 보석들이었다면 그것에서 이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난 작은 색연필. 작은 화분들. 예쁜 숟가락. 색색의 머리끈 같은 것을 사랑하기에 빈 색연필통에서 살면서 겪어야 하는 아픈 것들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빠른 성장을 하고 있는 아이가 성장통을 앓고 있을 때 나는 하나하나 사랑하는 것을 떠나보내며

노화통을 앓고 있나 보다. 나는 이제 쓸모없어진 건 아닌가 걱정하면서.

이런 글을 쓰는 나를 보며 아이가 중2병이냐고 묻는다.


아이도 알게 되겠지. 너도 내 나이가 되면 말이야. 알게 될 거야.

오늘은 눈을 4초에 한 번씩 깜빡이느라 신경 썼더니 어째 더 피곤한 눈을 쉬게 해 주려 일찍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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