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달콤하고 따뜻한 음료에 중독되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탈출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를 둘러싸고 있는 부드러운 천을 풀 수도 없었고 감시자들의 감시에서 벗어날 방법도 그때의 나로서는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나와 같이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냥 그 생활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 조차 없었다. 처음에는 신선한 음료를 먹이기 위해 데리고 나가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내 옆에 있던 사람이 어느 순간 돌아오지 않았을 때 나는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불안감과 공포에 휩싸였다. 그 사람이 언젠간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며 마냥 기다렸지만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순간 내가 신선한 음료를 마시고 돌아왔을 때 내가 들어온 날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이제 나의 차례가 오겠구나.'라고 생각하며 그 이후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일까? 아니면 나는 죽는 것일까?' 미지의 공포에 점점 잠식되어 나는 매일같이 눈물로 하루를 보냈다. "응애, 응애"
이곳에 들어온 지 2주가 되어가던 시점에 평소와 다른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감시자가 나를 싸고 있던 천을 벗기고 기존의 천과 다른 천으로 나를 포박했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더욱 두꺼운 천으로 이중으로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차례구나.' 감시자가 나를 번쩍 들어 올리고 이곳에서 나섰을 때, 두려움과 미지의 흥분이 뒤섞인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평소와 다른 옷을 입고 있는 여흑막과 바퀴가 달린 상자를 끌고 있는 남흑막이었다. 그동안 보이지도 않던 남흑막은 왠지 모르게 긴장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남흑막도 나처럼 음료를 먹다가 흘렸는지 왼쪽 어깨 부분의 옷은 축축이 젖어 있었다. 감시자는 나를 여흑막에게 전달하고는 무슨 간단한 말만 하고는 뒤돌아 사라져 버렸고 그 순간 여흑막은 몹시 경직된 채 나를 안아 들고 철문 앞으로 갔고 남흑막은 음침하게 뒤에서 따라왔다.
그 거대한 철문이 옆으로 갈라지며 열리고 그 둘은 나를 데리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은 아주 좁았는데 '삑'이라는 소리가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철문이 열렸다. 둘은 그곳을 나와 조금 걸어간 후 남흑막이 빨리 뛰어와 유리문을 열어젖혔다. 유리문 밖을 나오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내가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겪은 조용하고 따뜻했던 세상과 다르게 하늘에서는 수많은 물방울들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져 내리고 있었고 추운 바람은 2겹으로 감싼 천을 통과해 내 몸이 오싹할 정도로 불었다. 남흑막은 여흑막에게 비굴할 만큼 낮은 자세를 취하여 바닥에 세워진 간판을 가리켰다. 거기엔 '만차'라고 써져 있었지만 그 때 나는 그게 뭘 뜻하는지 몰랐다. 다만,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남흑막 보다 여흑막의 힘이 더 강력하다는 것을 느꼈다.
남흑막은 긴 막대기에 달린 천을 활짝 펴서 나와 여흑막의 위를 가려주었다. 정작 남흑막의 몸은 다 가려지지 않아 절반 정도는 떨어지는 물방울에 젖어들고 있었다.
'남흑막은 좀 멍청하구나. 조금만 조절하면 아슬아슬하게 다 같이 안 젖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떨어지는 물방울 속을 헤치며 뭐가 많이 달려있는 커다란 쇠상자가 많이 있는 곳으로 갔다. 남흑막이 쇠상자 중 하나(이후 나의 최후의 탈출 경로 2가지 중 하나인 '아빠차')를 열어 젖혔더니 여흑막은 그 속에 쏙 들어갔다. 나도 여흑막에 안겨 같이 들어갔다. 남흑막은 같이 들어오지 못하고 아빠차 바깥에서 바퀴 달린 상자를 아빠차에 집어넣고 누군가에게 달려가 종이를 건내고 동그란 쇠를 받아왔다.
남흑막이 아빠차로 들어왔을 땐 온몸이 다 젖어 있었지만 우리를 돌아보고는 멍청한 미소를 지으면서 여흑막에게 뭐라 말했다. 왠지 나의 적이지만 파워에서 밀린 비굴하기 짝이 없는 남흑막이 불쌍했다. 이런 감상을 뒤로하고 아빠차는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나는 다른 곳으로 보내지는구나.' 다행히 죽음이라는 끝이 아닌 것에 안도하면서도 이렇게 치밀하게 아빠차에 나를 넣어서 보내는 거대한 흑막 조직이 다시금 무서워졌다.
아빠차가 움직이며 흔들리는 진동과 혹독한 바깥세상의 경험으로 인한 피로에 나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쌕 쌕' 30분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는 흠칫거리며 깨어났다. 내가 깨어났을 땐 아빠차 앞에 커다란 바가 가로막고 있었지만 가까이 가니 자동으로 커다란 바는 위로 올라갔다. 아빠차는 유유히 커다란 바를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삐용삐용' 거리는 곳을 지나가며 음침한 지하로 계속 내려갔다. 한층 한층 내려감에 따라 나의 기분도 가라앉았다.
아빠차는 쇠상자들이 모여있는 곳에 멈춰 섰고 나를 안은 여흑막과 남흑막은 아빠차에서 나와 유리문을 향해 걸어갔다. 남흑막은 유리문에 붙어 있는 자그마한 쇠판의 여러 곳을 누렀다. 누를 때마다 '삑삑삑삑' 소리가 들렸고 유리문이 자동으로 스르륵 열렸다. 드디어 도착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빠차에 타기 전에 들어갔던 쇠문이 여기에도 있었다. 그 쇠문도 자동으로 스르륵 열렸고 둘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곳에 들어갔다. 남흑막이 '삑'하며 무언갈 누르니 뭔가 모를 부유감이 느껴지고는 그 부유감이 없어졌을 때 쇠문이 다시 열렸다. 그 쇠문 바깥은 들어갈 때와 또 다른 곳이었다.
그곳에는 미쳐버리게도 또 쇠문이 2개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남흑막이 골라 쇠문에 있는 쇠판을 또 누르기 시작했다. 경박하고 가벼운 '삑삑삑삑' 소리가 나를 가두는 감옥에 못질을 하는 것처럼 진중하고 무겁게 느껴졌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여흑막은 나를 높은 단 위에 놓았다. 나는 눕혀지면서 이때까지 온 길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철문 > 유리문 > 아빠차 > 커다란 바 > 유리문 > 철문 > 철문. 그리고 그곳을 지날 때마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공포스러운 '삑삑삑삑'.
'도대체 이 거대한 흑막 조직은 몇 개의 감금장치를 하는 것인가? 과연 나는 이 많은 굴레들로부터 벗어나 탈출할 수 있을까?' 나는 막막함에 힘없이 울었다. "응애, 응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