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건 정말로 슬픈 일일 거야
담백하다.
그리 오래갈 줄 몰랐던 연인의, 돌연 다큐멘터리 감독을 선언하고 나선 데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크게 와닿는다. 단순하고 특별할 것 없이 그려낸 이야기가 그래서 더 현실적인지도 모르겠다.
"네가 세상에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있을까."
연인에게 하는 말임과 동시에, 어느새 그와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게 되어버린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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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기증
금요일마다 사서 유리병에 꽂아두던 꽃처럼
'어떤 대상'을 흉내 내려고 하는 여자주인공이 돋보인다. 그것이 훌륭한 딸이든, 신혼부부든간에... 인생의 청년기에 겪게 될 현기증으로 보인다.
여행을 즐기지 않으면서도 부득부득 떠났던 유럽 배낭여행에서처럼, '즐기지 못했지만 그래도 죽지는 않았다'라고, '먼 훗날 이번 이사를' 기억할 것 같다는 생각... 더불어 모든 딸들을 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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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만한 나날
첫 직장에서 겪었던 이야기.
도대체 그 사건과 자신이 한 일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 의아할 대로 의아할 수 있으나, 이미 이전과 지금의 '나'는 달라져버렸다. 사회에 나와 시간이 지나면 묻는다고들 하는 때는 이런 것들이 아닐까. 언제부터였는지조차 알 수 없게 어느 순간 물들어버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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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림팀
가장 짧지 싶은데, 꽤나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팀장의 말을 들으며 선화가 느꼈을, 이름 붙이지 못한 그 수많은 감정들을 내 안에서 찾아보았고, 대체로 약점이 들킨 것 같은 부끄러움, 수치심, 민망함이나 혼란스러움이었다. 이처럼 정확히 무어라 설명하지 않고 감정을 묘사하는 것이 좋았다.
왠지 모든 걸 극복하고 새 출발을 한다는 팀장이나 선화나... 앞으로도 쉽사리 변화하진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팀장은 새 출발에서 또 다른 '선화'를 만들어낼 것이고 선화 또한 또 다른 모습의 '팀장'이 되거나 혹은 자기 안의 팀장 목소리를 쉽게 지우지 못하는 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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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물나들이에 갔을 때
무엇이 이토록 우리를 서글프게 만드는 건지.
스물여덟의 아들이 늙어 버림받은 아버지를 보며, 자신의 노후를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일이 비단 그 아들만의 일이 아닌 것만 같아 슬펐다.
보호를 받는 대상에서 보호자로 자리를 옮겼을 때 느끼게 되는 어려움과 혼란스러움, 두려움은 이전의 그것과는 질이 확연히 다를 듯싶다.
'물나들이' 풍경을 묘사하는 몇 줄에서, 김금희 [한낮의 연애]를 떠올렸는데, 그 작품의 '나무'와도 비슷한 감성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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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얕은 잠
화자처럼 길눈이 어두운 나로서는, 읽는 내내 울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길을 잃은 두려움이 극에 달했을 때, 아름답기만 한 풍경이 고스란히 두려움을 키우는 역할만 해 낼 때, 이 서사가 그것만을 위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연인인 정운이 아니면 애초에 여행도 서핑도 하지 않았을 미려가, 그에게만 의지해 길을 찾고 이동하던 미려가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낯선 남자와 동행할 적에는, 당황스러울 정도의 희망을 느꼈다. 두려움이 돌연 희망과 성장으로 변하는 것은 ([우리가 물나들이에 갔을 때] 속 손목 스냅 한 번으로 뒤집어지던 부침개만큼이나) 한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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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연습
인턴에서 간신히 정직원으로 전환이 되어 놓고도 대표의 '에이급은 금방 관두더라고'와 같은 의중을 알 수 없는 소리나 듣게 되는 회사 생활. 전쟁과도 같은 경쟁에서 이기려 들 땐 상대를 미워하다 머리까지 지끈거리더니, 진짜 전쟁과 관련해선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따먹는 생활. 새벽, 이웃 여자의 안위보다 자신의 위로와 다음 날 출근이 걱정될 수밖에 없는 현실. 스물여섯 화자가 살아내고 있는 지금은 멋들어지게 보이지만 구멍이 숭숭, 비가 새는 회사 건물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비단 그녀의 삶만은 아닌 듯, 다 읽은 뒤 두 눈을 감아도 번쩍이는 붉은빛이 꼭 내 앞에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