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쫓는 나
큰 아이의 유치원 버스는 8:33에 아파트 단지를 떠난다. 어린이집을 다녔을 적엔 보통 9:00에 집을 나섰다. 두 아이의 가방에 각각 물통과 고리수건, 수저통, 점심에 투약할 약 등을 챙기고 아침을 먹이고 씻겨 옷을 입히다 보면, 줄어든 30분이 꼭 세 시간 같다.
오늘은 오랜만에 약속이 있는 날.
시간에 쫓기면 신경이 날카로워지는지라 아침부터 잠이 덜 깼는지 울어재끼는 큰 아이의 온갖 투정에도 한 번 안아주지 못했다. 줄어든 시간을 마치 늘어난 것처럼 활용해야 하는데 밥솥에 밥이 없다. 잽싸게 쌀을 씻어 쾌속으로 밥을 안치고, 달걀 스크램블을 휘리릭, 정말 휘리릭 한다. 김가루를 부수고 치즈를 꺼내둔다. 남편이 무얼 아침으로 때우는지는 사실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와중에 부엌에, 그것도 내 다리 아래에서 주저앉아 우는 아이도 모른 체한다. 꼭 그래야만 하는 사람처럼 외면하고 도리어 마주하는 건 시간. 7시를 향해가는 시침.
시침과 분침이 밟고 지나가는 게 나라도 되는 것처럼 악소리가 나고 마음이 급해진다. 머릿속에선 계산이 세워진다.
밥이 되기 전까지 아이들 가방을 챙기고, 입을 옷을 꺼내두고 내 옷을 고르고 15분 정도에 밥이 되면,
40분까진 먹이고 양치를...
쾌속으로 완료된 밥으로 주먹밥을 만들며 중얼거린다. 아 나 씻어야 하는데, 머리 감고 말려야 하는데...
아이들 입에 쏙 들어가 그리 오래 씹지 않아도 될 정도의 크기만 갖춘 주먹밥의 모양은 뒤죽박죽 대충이다. 뜨거워 조금 식게 두는 동안 잽싸게 욕실로 뛰어간다. 머리를 감고 차마 드라이기는 집어 들지 못한 채로 로션만 세수하듯 얼굴에 비벼 바른다.
내 옷을 꺼내두고 고맙게도 나를 졸졸 쫓아다니며 일거리를 만들어 주는 작은 아이의 손을 그러쥐고 주방으로 향한다. 조물조물 만들어 둔 주먹밥을 아이의 입 속에 쏙 넣어주면, 오물오물 맛있게 먹어주는 작은 아이를 잠시 바라본다. 그릇 채로 들고 거실로 향해 큰 아이 입속에도 넣어준다. 치즈를 좋아하는 두 아이가 참새처럼 입을 쩍쩍 벌리는 모양을 보고 있다가 정신이 번쩍 든다.
아가 꼭꼭 씹어. 천천히 먹어. 엄마 바빠, 급해.
천천히 먹으라고 해 놓고, 바쁘고 급하다니. 내가 아이라면 어쩌라는 것인지 혼란스러울 것 같지만 그저 흐르는 시간이 야속할 뿐이다. 그러는 동안 머릿속에선 출근하는 워킹맘들을 대단하다 추켜세우며 나는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시간에 쫓기면 방망이질을 해대는 심장에 일찍 죽게 될 거라고 엄살을 부린다. 주어진 시간에 두 아이의 등원 준비와 나의 외출 준비까지 마친 순간 작은 아이가 돌연 양말을 벗어던진다. 이거 아니라며 양말이 든 서랍에서 이미 작아져 신기에 무리가 있는 하늘색 양말을 가지고 온다. 벌써부터 양말을 고르는 아이가 신기하면서도 그 순간이 왜 하필 지금인지 한탄스러운데 큰 아이가 똥!! 을 외친다. 세상에서 제일 눈치 없는 게 있다면 아이들 똥이다.
큰 아이를 변기에 앉혀두고 다 하면 부르라고 일러준다. 작은 아이에게 돌아가 양말을 신기는데, 구수한 냄새가 확 끼친다. 눈치 없는 똥2...
오늘 아침 내가 가장 많이 한 말은 ‘빨리’
빨리 먹어야 해
빨리 옷 입어. 빨리, 양말
아 빨리 싸라...
빨리 이리 와
빨리 신발 신어야지
빨리..
빨리.. 제발 좀!?
아이가 왜 빨리해야 되냐고 묻지 않은 게 고마울 정도로 오늘 아침은 빨리빨리였다. 작은 아이의 엉덩이를 닦이면서는 헛웃음이 나왔다. 유치원 버스를 놓치면 놓치는 거고, 약속에 조금 늦으면 늦는 거지 서두르는 엄마를 보며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싶은 게, 시간은 죄가 없고 나를 쫓는 건 오히려 나 자신인 모양이다.
큰 아이는 제시간에 유치원 버스를 탔고 뒤이어 작은 아이도 어린이집에 등원했다. 이후엔 급히 서두르지 않아도 버스를 탈 수 있었고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해 이렇듯 일기를 쓴다. 서둘러서 일기 쓸 시간이 남았다기보단 어차피 일기 쓸 시간은 주어졌을 오늘 이 시간. 스스로 시간에 쫓겨 남편은 물론이고 두 아이까지 마음이 들뜨게 만든 데에 대해 조금은 민망하고 낯부끄럽다. 그렇다고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는 건 아니다. 그런 마음을 다져봤자 지키지 못할 거란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어쩐지 지난 일기처럼 이 또한 수치의 기록이 된 듯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나라는 사람인 걸. 아이들이 나의 이런 점은 닮지 않기만을 바라지만, 닮는다 해도 그 또한 내가 어쩔 수 있을까. 다만, 노력해야지. 차분해지는 나를 꿈꿔보기도 해야지. 이 정도 노력은 해봐야지.
오늘 아침 조급해하며 미간을 찌푸리는 나에게 비타민 B, C를 입에 넣어주곤 짓궂은 농담으로 웃게 만들어 준 남편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한다.
마치 수상 소감 같은 수치 소감으로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