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모성애는 없었다.
지난주는 장염으로 고생을 했다. 점점 더워지는 날씨에 안 좋은 속까지 부여잡고 육아를 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새로이 시작한 모임에 나가면서는 이렇게까지 거길 부득부득 가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럴 때면 종종 내가 기록한 일기를 되새기게 되는데, 때마침 그때 가장 최근에 쓴 일기가 “핑계 대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프다는 핑계로 해내야 할 것들을 못해내는 사람이 되어버릴까 봐 2시간 남짓한 거리를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가며 다녀왔다. 버스에서 혹여 구토를 하게 될까 신경이 곤두섰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지만 화요일에 시작된 장염은 주말이 되어서야 잦아들었다.
장염이 지나간 자리에 지독한 목감기가 찾아왔다.
월요일 무렵 목이 아파왔지만 동네 이비인후과를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 동네란 곳은 어느 병원을 가나 사람들이 꽉 들어차서 지난주 장염으로 내과를 방문했을 때에도 꼬박 한 시간 삼십 분을 기다렸다. 울렁거리는 속을 모른 체 하며 자리에 가만히 앉아 진료를 기다리는 일이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이비인후과도 비슷하다.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 않다. 매번 갈 때마다 5분도 되지 않는 진료를 보기 위해 한 시간은 거뜬히 앉아 있어야 했다. 그래서 병원을 가기보단 푹 쉬는 쪽을 택했고, 결과적으론 다음 날 큰 아이가 목이 아프다 하여 함께 소아과를 갔다.
일주일이 통으로, 두 아이의 감기와 나의 감기로 범벅되었다. 며칠 동안 내내 코와 목이 매캐한 느낌이 가시질 않는 나의 증상은 큰 아이가 아무래도 아데노바이러스인 것 같다는 진료 소견으로 인해 별 것 아닌 일이 되어버렸다. 고작 감기 앞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얼른 낫자는 바람이나 제발 작은 아이가 아데노만큼은 옮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 정도라고 생각하면, 엄마도 무력한 인간이란 사실만 깨우친다.
무더위에 골이 띵한 감기를 안고 있는 것도 조금 버거운데, 고열로 등원을 하지 못한 큰 아이를 데리고 있는 일이 새삼 첫 출산을 하고 느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큰 아이는 40주 6일의 재태 기간을 꽉꽉 채우고 태어났다. 3.2kg인 줄 알았는데, 2.58kg로 태어났고, 세수를 한 것처럼 아주 깨~끗한 모습으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똥말똥 나를 쳐다봤다. 전혀 나를 닮지 않은 모습에, 매섭게 나를 노려보는 듯한 눈동자에 당혹스러움 뒤론 꽤 낯선 감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이를 무척 좋아하는 내가 아이를 좋아하는 것과 키우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란 걸 알게 되기까지는 만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코로나로 남편도 들어오지 못하는 조리원에서 혼자 아이를 안고 끙끙대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아득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잘못 된 것만 같은 느낌, 출산이 다인 줄 알았는데 실은 이게 시작이라는 두려움이 아이가 난 자리를 새까맣게 채웠다. 혼란스러울 때마다 친정 엄마에게 전화해 이게 어렵고 저게 어렵다고 투정을 부렸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집에 오면, 엄마한테 오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나를 다독였다. 큰 힘이 되었다. 물론 그 힘도 얼마 못 가 영향력을 잃었지만.
4킬로도 되지 않는 작은 아이를 부서질세라 조심히 보듬고 친정에 도착했을 때 엄마의 첫마디는 생각보다 너무 작다, 였고 아이를 안은 지가 너무 오래돼 이게 맞나, 하는 태도였다. 엄마만 믿고 왔는데, 엄마도 그리 믿음직스럽지 않다는 걸 깨닫자 나는 정말 아무도 없는 세상에 아이와 단 둘이 내던져진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친정에서 엄마의 도움을 받는 동안 엄마도 나도 굉장히 혼란한 시간을 보냈다. 극 J 성향의 엄마는 당신의 하루 계획 안에 아이와 나를 빠르게 끌어들였고, 출산한 딸의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가며 작고 소중한 생명체의 일과도 살뜰하게 챙겨나갔다. 그럼에도 나는 한 없이 외로웠다. 출산을 경험한 반나절도 되지 않는 시간을 전후로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과 그 어마어마한 변화를 받아들이기엔 너무 자신이 없었다.
그랬다. 자신이 없었다. 내가 과연 이 아이를 잘 키워낼 수 있을지, 이렇게나 아이 울음에 속수무책인데 과연 해낼 수 있을지 막연히 두렵고 자신이 없었다. 우는 아이를 눕혀두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혼자 끙끙 앓듯 우는 나를 두고 엄마와 아빠는 나무랐다. 자신이 없다는 딸에게 그럼 어떻게 할 거냐고 한탄스러워했다. 사실 그때의 기억은 세상의 중심에 아이와 단 둘이 내던져진 것 같은 혼란함 속에서 돌연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과 같은 상처가 되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 하나는 태초에 모성애는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지금도 여전히 아이들과 매일을 고군분투하며 모성애가 생기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육아가 이렇게 버거운 걸 보면 나는 책임감이 없는 사람인가 의문이 들고 좌절에 빠진다. 아이가 아플 때면 대신 아프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새삼 가정보육에 자신이 없어진다.
그러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지 생각한다. 아프단 핑계로 미뤄둔 브런치북 연재가 그중 하나다. 두 아이의 삼시 세 끼를 챙기는 것처럼 당연하게 전혀 새삼스러울 것 없이, 해 내보자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면 어쩌면, 육아도 그 대단한 자신감이 아니더라도 당연하고 새삼스럽지 않게 해내는 일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