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고열로 등원을 하지 못한 큰 아이의 손을 잡고 작은 아이 하원을 위해 집을 나섰다. 오후 다섯 시를 바라보는 시간, 아파트 한쪽에 자리한 벤치에 한 남학생이 앉아 있었다. 사복 차림이었지만 열일고여덟 살처럼 보였다. 한 손엔 핸드폰을 들고 통화를 하며, 다른 한 손엔 담배를 들고, 저를 보는 나를 흘깃거리는 모양과 태도가 영락없는 학생이었다.
아이 손을 잡고 지나가는 어른을 앞에 두고 눈치를 보면서도 멋대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영 마땅찮았지만 나는 그냥 고갤 돌렸다.
결혼 전, 밤 중에 도서관에 갔다가 우르르 모여 담배를 피우는 학생들을 마주한 적이 있다. 어떤 어른이 지나가든 상관 않고 자기네들끼리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하하 호호 즐겁게 뻐끔거렸다. 그것도 교복차림으로. 그냥 지나쳐 집으로 갈까 하다가, 어른들도 지나다니는, 도서관이라는 공간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학생들에게 한 두 명쯤은 쓴소리를 하는 어른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담배 끄라는 말에 몇 명은 도망을 치고 두어 명만 남았는데 마치 다른 사람처럼, 제법 혼이 나는 아이의 모습으로 잘못했다고 수긍을 했다.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임신했을 적엔 길을 가다 길 한복판에서 담배를 피우는 학생 서넛이 눈에 띄었지만 난 내 배를 감싸 쥐고 눈을 피한 채로 길을 돌아갔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같은 학교 6학년생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 두 살 터울인 나의 친언니와 내가 등교를 할 때마다 뒤에서 우리를 발로 차고, 복도에서 마주치면 욕을 하는 등으로 위협적인 모습을 보였다. 어느 한 날 참다못한 친언니가 공중전화로 엄마한테 전활 걸어 어떤 언니들이 우릴 괴롭히고 있다고 말했고 그날 바로 우리는 엄마와 담임선생님과 함께 6학년 반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누가 괴롭혔는지 짚어냈다. 콕 짚어 불려 나온 그들은 일전에 동네 앵두나무의 앵두를 따는데 우리가 주인 있는 앵두나무를 왜 따냐고 나무라는 말을 해서 화가 났다고 했다. 말 그대로 보복성 괴롭힘이었다.
동네에서 담배를 피우는 청소년에게 훈계를 했다가 그 길로 학생들이 집을 알아내 며칠이고 보복성 행동을 했다는 기사는 한낱 제보자의 기우도 아니고, 한 두 뉴스로 끝나는 일도 아니다.
담배를 피우는 미성년자에게 어른으로서 훈계하는 걸 당연시하려는 건 아니다. 제 부모도 어쩌지 못하는 걸 타인이, 고작 나이 몇 살 많다는 이유로 나무랄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눈치가 보이는 행동이라면, 적어도 버젓이 과시할 필요까진 없지 않냐고 일러주고 싶을 뿐이다. 그들에겐 그저 고리타분한 기성세대의 권위주의적인 행세일지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책임져야 할 것들과 지켜야 하는 것들이 많아진 지금은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아이를, 그것도 딸 둘을 키우는 엄마로서 타인에게 쓴소리를 하는 건 나의 가장 취약한 점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타인이 객쩍게 부리는 혈기가 왕성한 나이라면 더 그렇게 느껴진다. 괜스레 내 아이를 중심으로 한 어떤 보복성 행위가 상상이 된다. 결말이랄 것도 없이 시작부터 끔찍하다 여겨져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는다. 내 아이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이 소름처럼 돋아난다. 결국 무엇을 목격하든 두 눈 감고 입 다무는 어른이 되고 만다. 어른의 무게는 그렇게 하찮아진다.
아이를 키우며 어른의 무게가 하찮아지는 일이 고작 담배정도로 끝난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책임질 것과 지켜야 할 것이 많아지면서 눈 감고 고개 돌려야 할 일이 고작 그 정도뿐이라면 진정 다행이다.
아니, 내 것을 지키느라 모른 체하는 일들은 어쩌면 어른이 될수록 더 많아지는지도 모른다. 실은 그렇게 어른의 무게가 하찮아지는 게 아니라 부끄러운 어른이 되어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