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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향 Jul 03. 2024

나를 깨우는 시간

근래 나의 컨디션은 항상 좋지 못했다. 밑바닥을 드러낸 컨디션으로 아침에 눈을 뜨는 것조차 달갑지 않았고 하루하루 주어진 일과가 더없이 버거웠다. 보름하고 며칠이 지나는 동안 장염과 지독한 감기를 오가며 앓았는데 감기는 실은 아직도 내 몸에서 사투 중이다. 한 달 전 받은 건강검진 결과로 보아 어느 곳 하나 아프지 않아야 마땅하지만 과연 어느 곳 하나 성할까 싶게 매일 몸과 마음이 축축 처졌다. 정말 면역력 수치가 맞아떨어지는 것인지 온몸 이곳저곳이 아팠다. 지난 주말엔 불쑥 왼쪽 위 어금니가 아파왔다. 하다 하다 안 아픈 곳 찾는 게 다 수월할 정도이니 어디 제대로 고장 난 데가 있는 건 아닐까 두려워졌고 한편으론 어처구니가 없었다. 통증이 시작된 어금니는 하루 사이에 왼쪽 뺨을 붓게 했고 귀밑 림프절까지 아파왔다. 베개에 왼쪽 뺨을 베고 눕는 일도, 입을 벌려 음식을 넣고 씹는 일도 모두 불편할 정도로 통증이 번졌다. 아무리 충치가 생겼다지만, 귀밑까지 아플 일인가 싶어 무서워졌다. 충치 치료는 둘째로 치고 어떻게 하면 귀 밑이 아플 수가 있는지, 과연 이 통증이 어금니 때문은 맞는지, 어떻게 이렇게 한 달이 다 되어가도록 속수무책 아플 수가 있는지 무서워졌다.




주말이 지나고 치과를 갔다. 예약이 안 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딱 알맞은 시간에 자리가 있었고, 예약을 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본 진료에서는 충치가 이제 막 시작되는 듯해 통증이 심할 것 같진 않다는 것과 귀밑 통증은 더욱이 어금니와 관련이 없을 것 같단 말을 들었다. 볼이 붓고, 귀밑이 아프고 두통까지 생겼는데 어금니 때문이 아니다?

의사는 그럼 도대체 뭣 때문에 여기가 아픈 거냐 호소하듯 묻는 내게 이비인후과를 가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치과 치료를 끝내고 병원 점심시간을 30여 분 앞뒀을 때 이비인후과에 도착했다. 평소 아홉 시가 되기 무섭게 병원 대기실을 빼곡히 채우던 사람들이 점심시간을 앞두고는 모두 빠져나가 보이지 않았다. 당장 진료를 못 보더라도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막상 예상과 달리 한산한 병원을 보니 기쁘기까지 했다. 빠르게 순서가 다가왔고, 의사는 비염이 심해졌다며, 이것저것 자세한 증상을 물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어보자 했다.

결과는 축농증. 여실히 드러난 나의 두상 X-ray 사진엔 그간 나를 힘들게 했던 것들이 부비동을 채우고 있었다. 밥 먹기를 게을리하고, 약 먹기는 더 터부시 했던 결과가 농으로 쌓여 있었다. 고작 주먹 크기만 한 농이 나를 그토록 힘들게 한 건가 싶었지만 의사는 심하다 했다. 오래 두면 수술까지 고려해보아야 한다며, 얼른 약물 치료를 하자 했다.

약을 먹기 시작하자 씻은 듯 나았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거였구나 싶을 정도로 말끔해졌다. 아니 증상은 말끔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기분과 체력이 돌아왔다. 하루 종일 까무룩 졸리고, 두통과 코 맹맹함에 흐트러지는 집중력을 다잡느라 지쳤던 모든 것들이 약 몇 번에 잠잠해졌다. 다행이다.



아프단 핑계로는 아니었지만, 줄곧 미뤘던 화장실 청소를 했다. 집안일이란 것은 해도 해도 끝이 없는데, 하기 전에 수많은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안 하게 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 정도로 아무 생각 없이, 해야 하는 일이니 기꺼이 하는 것처럼, 몸이 절로 움직이는 것처럼 해야 계획한 집안일을 수행하게 된다. 화장실 청소는 이제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는데, 무엇보다 큰 아이 입에서 “더럽다”라는 말이 나와 낯이 붉어졌기 때문이다. 큰 아이와 유치원 다녀오면 아주 깨끗해질 거라고 약속도 했기 때문에 무조건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절로 움직여 청소를 수행해야만 했다. 삐리삐리.


매번 미뤘던 무언가를 할 때마다, 특히 더러운 걸 치우고 솎아내고 닦고 정리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 행위 자체가 주는 희열이 있다. 화장실 청소도 바닥을 솔로 박박 닦으며 내 마음의 묵은 때가 벗겨지는 듯했다. 지쳐 쓰러져만 있던 지난 시간들을 흘려보내고 다시 삶의 한 복판에 나를 던져두었다.

화장실 청소를 끝내고 샤워를 마친 뒤 커피 한 잔과 최근 읽기 시작한 책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바쁘게 움직이고 주어진 커피 한 잔을 두고 책 한 권을 읽는 시간. 내가 이런 시간을 항상 꿈꾸고 평온해하며 좋아할 수 있었던 건 이전에 바쁘게 움직였기 때문이었단 사실을 그간 망각하고 있었다.




쉼 없이 달리다 헐떡이며 몰아쉬는 숨처럼, 그럴 때 벌컥벌컥 들이켜는 물처럼 내 몸과 정신을 달래는 것도 없는 것 같다. 한 숨 돌리면서 새삼 얻어지는 것들이 많아 비상한 시간이란 생각도 든다. 매번 쉼 없을 필요는 없지만 일상 속, 커피 한 잔과 책 한 권의 여유가 얼마나 달콤하고 행복한 것인지를 잊지 않으려면 오늘도 열심히 달리고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근 한 달 동안 시름시름 앓다 깨어난 뒤에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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